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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문태준의 세상사는 이야기

호수의 얼음 아래에 있는 차분하고 한결같은 내면의 거실

  • 입력 2022.11.28
겨울이 오면서 나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펼쳐서 읽고 있다. 그 가운데 한 권은 불멸의 고전이라고 칭해지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다. 이 책은 두 달여에 걸친 숲에서의 생활을 기록한 책이다. 
이 책에는 겨울을 나는 풍경이 여럿 실려 있다. 작가는 혹한이 올 때를 대비해 지하실에는 감자가 담긴 작은 통과 완두콩을, 그리고 선반에는 약간의 쌀과 당밀과 호밀 가루, 옥수수 가루를 보관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작가가 겨울 풍경으로 쓴 대목들 가운데 내 눈에 이번에 새롭게 들어온 것은 호수의 얼음을 바라보는 작가의 생각과 행동이었다. 그는 호수 수면에 1인치 두께로 얼음이 얼면 소금쟁이처럼 얼음 위에 엎드려 얕은 곳의 호수 바닥을 살펴본다. 또한, 얼음 밑에 있는 기포들의 아름다움을 보는데, 그 기포들을 작가는 “염주알을 이어놓은 듯 위아래로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고 표현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호수의 얼음이 더 두꺼워지면 작가는 눈 덮인 호수를 걸어 들어가서 1피트 깊이의 얼음을 잘라내고 호수 속을 바라본다. 작가는 이렇게 썼다. 

“부드러운 햇볕이 스며든 물고기들의 조용한 거실과 여름 때와 똑같이 밝은 모래가 깔린 호수 바닥을 내려다본다. 수면 아래는 황혼녘의 호박색 하늘처럼 언제나 잔잔한 평온함이 지배해서 그곳에 사는 거주자들의 차분하고 한결같은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나는 이 문장들을 읽으면서 어떤 희열 같은 것을 느꼈고, 작가가 호수 아래를 내려다보는 행위가 내면을 살펴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면을 살펴보아서 내면 속에 늘 한결같이 있는 부드러움과 조용함과 평온함과 차분함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에게도 겨울이 왔다. 이제 눈은 내려 쌓이고, 눈보라는 바람에 실려서 가고, 물이 괸 곳에는 얼음이 얼고, 우리는 더 두터운 외투를 몸에 걸친다. 온기가 있는 곳을 찾아가고, 우리의 거실과 안방에도 온기를 가득 채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따뜻함을 카페트처럼 펼쳐 놓으려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겨울의 도래와 함께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본다. 올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한다. 

나는 이즈음을 살면서 올해 내내 내 마음에 분노가 적었다는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한다. 작년보다 화내는 일이 적었고, 화내는 일이 무용하다는 것을 점차 깨닫기도 했다. 그리고 화가 날 때에도 화가 생겨났다는 것을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쩌면 나도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언 호수의 수면 아래에서 발견한 평온한 내면의 거실이 내 내면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올해에 내가 살고 있는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 시골 마을에서 종소리를 자주 들었다. 하루의 노동이 끝나는 해질 무렵이나 하루가 시작하는 새벽에 종소리를 들었다. 특히 새벽 4시에 시골집 마당에서 듣는 종소리는 각별했다. 어느 날 새벽에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새벽하늘을 올려 보았고, 어느 날 새벽에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싸락눈이 막 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종소리가 오는 곳을 찾아가 보지는 않았지만, 절에서 종소리가 오는 것으로 알고만 있다. 올해에는 새벽 종소리가 올 적에 저 절에 가야겠다고 생각을 여러 차례 해보는 데에 그치고 말았지만, 내년에는 찾아가 볼 생각을 갖고 있다. 

종소리는 내 사는 일의 형편을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니, 내 마음과 내 행위를 되돌아보게 한다. 가쁜 숨을 잠시 고르게 하고, 잡념이 사라지게 한다. 종소리를 들으며 나는 목숨을 지닌 한 인간으로서 잘 살아야겠다고, 맑은 영혼으로 살아야겠다고, 이 세계에 선함을 보태며 살아야겠다고 기도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다. 

“나는 가능 속에 살아요-
산문보다 더 아름다운 집이지요-
 창도 훨씬 많고요-
 문이라 하기에는- 훨씬 좋죠-” 

이 시구를 읽을 때마다 나는 나의 삶을 위해 더 정진할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능의 확대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것은 멋진 회향이 될 수 있겠다. 내 몫의 가능을 넓힌다는 것은 그 가능의 실현을 통해 더불어 생겨난 이익이 있을 테고, 그 이익은 내게는 너무 많은 수량이 될 것이므로 그것을 주변과 이 세계에 나누게 될 테니 말이다. 또한, 어떤 가능의 확대는 아름다움의 확대에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나는 시인 존 키츠가 그의 시를 통해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며, “우리를 위해/ 나무 그늘의 평온, 달콤한 잠들로 가득한/ 잠, 그리고 건강, 그리고 고요한 숨결이 되어준다./ 그리하여, 아침마다, 우리/ 꽃띠를 엮어 대지에 우리를 묶는다.”라고 노래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겨울의 도래와 한 해의 석양과 새해의 새벽이 다가오는 것을 맞이하고 겪으면서 차분한 내면의 거실과 가능의 확대, 선한 행위의 회향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눌 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도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뜻을 굳게 하여 스스로를 경책하며 게으름을 막고 허물을 알아서 선으로 나아가며, 참회하여 스스로를 부드럽게 하라. 부지런히 닦으면 관찰의 힘은 더욱 깊어질 것이며, 연마하면 실천의 길은 더욱 청정해지리라.” 

새로운 시간은 매번 우리의 내면과 행위를, 삶을 새롭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반조하게 하고, 동시에 서원의 계기가 된다. 


 

문태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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