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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알아두면 쓸데있는 불교 공부

낙엽은 떨어져 근원으로 돌아간다

  • 입력 2022.11.28

어느 순간 북한산 자락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강물처럼 푸른 빛으로 출렁이던 산자락이 순식간에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변했다. 인수봉 주변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단풍은 날마다 산등성이를 타고 마을까지 내쳐 달려왔다.

 

 

체로금풍의 계절

그렇게 세상이 온통 눈부신 풍광으로 변했지만 아름다운 것은 길지 않았다. 돌아서니 길바닥은 노란 은행잎으로 덮이고, 마당에는 감나무 잎이 두껍게 깔렸다. 상수리나무 밑으로 뻗은 산책길에도 양탄자처럼 낙엽이 소복이 쌓였다. 수액이 말라가는 낙엽은 날카롭게 부서지고, 싱그럽던 나무들은 나목으로 변해가니 자연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이다.

 

하지만 선사들은 조락(凋落)의 계절을 다른 느낌으로 바라보았다. 수행자에게 나뭇잎은 번뇌에 비유된다. 하나의 줄기에서 비롯된 나뭇잎은 수만 가지로 뻗어 무성하게 잎을 피우고, 작은 바람만 일어도 사시나무 떨듯 흔들린다. 마찬가지로 한마음에서 비롯된 번뇌도 팔만 사천 가지로 뻗어가 육진의 풍파에 쉼 없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뚝한 나목만 남는다. 나목의 그런 굳건함에는 번뇌를 모두 떨쳐버리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드러내는 수행자의 이미지가 담겨있다. 여기서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선어(禪語)가 생겨났다. 황금빛 가을 산야에 이는 바람을 금풍(金風)이라고 한다. 여름날의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기만 하지만 가을에 이는 바람은 나뭇잎을 모두 떨어지게 하는 칼바람이다. 금풍에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나무는 비로소 우람한 본래 모습으로 우뚝 선다. 번뇌를 벗어버린 수행자도 그런 나무처럼 굳건하게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음을 이르는 말이 체로금풍이다.

 

 

겁화의 맹렬한 불길

물론 가을에 대한 단상이 이렇게 긍정적으로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만산홍엽으로 아름다운 계절일수록 그 순간은 스쳐 가듯 짧은 법이다. 더구나 낙엽 따라 지는 것은 가을뿐만이 아니다. 지는 낙엽을 따라 한 계절이 지고, 한 해가 저물기에 낙엽은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을 깨닫게 해 준다.

 

경전에서는 이런 시간의 흐름을 ‘겁화(劫火)’라고 비유했다. 겁화란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파괴되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空)의 시공으로 돌아갈 때 온 우주를 불태우는 거대한 불꽃을 말한다. 이를테면 엄청난 질량을 가진 큰 별이 사라질 때 거대한 핵폭발을 일으켜 모든 것을 불태우고 마침내 블랙홀로 사라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대장엄경』에는 “겁화의 불길이 일체를 불태운다(劫火焚燒一切).”고 했다. 여기서 겁화란 초신성의 핵폭발과 같은 물리적 불꽃이 아니라 시간이라는 불길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겁화의 불길은 별의 소멸과 같은 우주적 차원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겁화는 모든 존재에게 매 순간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불길이다. 낙엽이 붉게 타오르며 떨어지는 것도 겁화의 불길에 한 존재가 연소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시간의 불꽃은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연소시켜버린다.

 

시간이라는 겁화가 작용하는 원리는 다름 아닌 무상(無常)이다. 영원하지 않은 것, 항상 오늘과 같지 않고 매 순간 변해가는 것이 무상이다. 달리 말하면 무상이란 곧 변화라는 불길이다. 그 변화의 불길이 이 세상 모든 것을 남김없이 불태운다. 우리의 눈에 단풍이 붉게 물드는 것이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상은 한 계절이 연소하는 불꽃이며, 한 존재가 무상의 겁화에 불타 사라지는 광경이다.

 

『불본행집경』에 따르면 “마치 겁화의 불꽃이 일어나 맹렬한 불길로 세상을 불태우듯 무상도 그와 같이 세상을 모두 불태운다(猶如劫火起 炎熾燒世間 無常火亦然 燒盡一切世).”고 했다. 계절의 변화, 사물의 변화, 생체의 노화가 모두 무상의 불꽃이 타오르는 연소과정이다. 이처럼 무상은 곧 시간의 흐름이고, 계절의 변화이고, 생명의 늙어감이다.

무상은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지만 그 작용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 부지런함을 지녔다. 우리가 잠든 사이에도 무상은 흐르고, 먹고 마시는 사이에도 무상은 흐른다. 촌각도 멈추지 않기에 무상이 초래하는 변화는 빠르게 느껴진다. 이를 두고 선사들은 ‘무상신속(無常迅速)’이라고 했다. 존재의 변화가 쏜살처럼 빠르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가을날 열매의 씨방 같은 육신

모든 존재는 이렇게 겁화의 불길에 불타고, 무상의 흐름에 휩쓸려 가기에 『금강경』에서는 “모든 존재는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고 번쩍하고 사라져가는 번갯불과 같다.”고 했다. 존재의 속성이 이렇게 한순간이기에 인간은 필사적으로 영생을 꿈꾸게 되고, 불사의 삶을 갈망하게 된다. 불교와 치열하게 불도지쟁(佛道之爭)을 벌였던 도교의 행태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그들은 신비로운 단약[神丹]을 만들어 먹고, 육신을 단련하여 신선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 모든 것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장생불사(長生不死)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현광스님은 『변혹론』이라는 글을 지어 그들의 허황됨을 꾸짖었다. 즉, “육신은 가을날 열매꼭지처럼 위태롭고(質危秋蔕), 목숨은 봄날의 얼음처럼 덧없다(命薄春氷).”라는 것이다. 육신은 가을날 열매의 씨방처럼 위태롭다는 비유가 가슴을 치게 한다. 알밤이나 도토리가 익으면 나뭇잎을 흔드는 미세한 산들바람에도 툭툭 떨어지고 만다. 무상의 겁화 앞에 우리들의 육신도 그렇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보조국사 스님도 「수심결(修心訣)」에서 “무상의 변화가 빨라 육신은 아침이슬과 같고, 목숨은 서산에 기우는 해와 같다. 오늘은 비록 살아 있으나 내일도 살아 있기는 어렵다(無常迅速 身如朝露 命若西光 今日雖存 明亦難保).”고 했다. 육신은 아침이슬처럼 부질없고, 명줄은 서산으로 기우는 석양처럼 짧디짧은 것임을 일깨우는 말씀이다.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

그러나 낙엽이 진다고 마냥 슬퍼하고 좌절할 일만은 아니다. 무상은 마르고 떨어지는 부정적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을날에 보면 무상의 겁화는 소멸의 길처럼 보이지만 사계절을 놓고 보면 가을의 조락은 겨울을 이기기 위해 뿌리를 가꾸는 것이고, 봄날의 소생을 위한 생명의 몸짓이다. 인간의 삶도 생사윤회의 관점에서 보면 낡은 육신을 버리고 건강한 새 몸을 받기 위한 순환의 과정이다.

그래서 육조혜능 선사는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고 했다. 낙엽은 존재의 소멸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근원으로 돌아가는 순환이라는 것이다. 가을바람에 소소히 떨어지는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 겨우내 눈비 맞고 썩고 또 썩는다. 삭풍에 부서지고 철저히 썩어야만 새봄이 왔을 때 다시 에너지가 되어 파르라니 고운 생명으로 움터 나올 수 있다.

 

이런 이치를 선사들은 ‘사중득활(死中得活)’이라고 했다. 조락과 소멸 속에 오히려 새로운 삶의 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생명은 그렇게 순환하며 영속하기에 조락은 단지 겉으로 나타난 현상일 뿐 잎이 져도 단 하나의 잎도 떨어지거나 소멸한 바가 없다. 공(空)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는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실상을 알게 된다.

 

이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낙엽을 보며 삶의 부질없음, 육신의 무상을 깨닫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런 자각에서 한발 더 나아가 썩어감의 가치를 깨닫고, 소멸이라는 과정이 동반하는 창조적 소생에 대한 통찰로 이어진다. 모든 존재는 썩고 해체됨으로써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 전체와 통합되고 다시 개별 생명으로 소생하는 과정을 겪는다. 그런 점에서 개체의 쇠락과 해체는 표면적으로는 존재의 소멸로 보이지만 실상은 재생과 순환이라는 생명 현상이다.

 

이런 통찰력을 지닌 사람은 낙엽이 지는 과정, 삶이 사위어 가는 순간에 절망과 슬픔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 속에서 긍정의 메시지를 읽어내고 보다 큰 삶에 대해 사유한다. 지는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듯 모든 존재의 쇠락과 소멸도 근원으로 돌아가는 몸짓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에 자신을 맡겨놓고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 된다. 대혜스님은 “무상이 신속하니 나고 죽음이 큰일이다. 손가락 한번 튕기는 사이에 내생이 온다.”라며 삶의 무상성을 경고한다. 그리고 스님은 “무상이 신속하니 게으르지 말라(無常迅速 莫作等閑)”는 경책의 말씀을 빼놓지 않았다. 무상함으로 오늘 하루 성실하고 부지런히 정진하고, 이 순간을 소중히 가꾸라는 것이다. 우뚝 선 나목을 보며 다시 봄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보아야 하지만 이 순간을 아름답게 가꾸는 성실함과 근면함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무상의 겁화에 의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눈부신 불꽃으로 타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재영 (성철사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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