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鷄龍山)은 통일신라의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으로, 조선시대의 삼악(三嶽) 중 중악(中嶽)으로 나라에서 산신제를 모셨던 명산이다. 차령산맥의 산봉우리들이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시, 논산시, 대전광역시 등에 걸쳐 있는 산을 계룡산이라고 부른다. 주봉인 천황봉(846.5미터)에서 연천봉,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계룡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정감록》에는 난세의 피난지로 적혀 있어 한때는 수많은 신흥종교 및 사이비 종교 신봉자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이 영험한 계룡산에 오래된 사찰이 없을 리 없다. 동쪽에는 동학사, 서쪽에는 갑사, 남쪽에는 신원사가 삼국시대부터 자리 잡았으며, 북쪽에는 당간지주만 남은 구룡사가 있었다.
〈주지스님과 함께하는 화엄성중 가피순례〉의 마지막 순례지로 계룡산 갑사와 신원사를 순례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긴 시간 멈추기도 했던 가피 순례길을 찬찬히 떠올려보면서 부처님의 가피가 늘 함께했음을 깨닫는다. 새해에 조계사 불자들의 삶의 순례길에도 자비하신 부처님의 미소가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이 연재를 마친다.
계룡산 갑사는 420년(백제 구이신왕 1) 백제 땅 웅진(공주)에 고구려 승려 아도 화상이 세운 1,600여 년 된 고찰이다. 계룡산 신원사 또한 고구려 보장왕의 국사였던 보덕 화상에 의해 651년(의자왕 11)에 창건되었다. 삼국이 서로 싸우던 시기에 고구려의 승려가 백제 땅을 찾아와 지은 갑사와 신원사……. 결국 백제가 패망함으로써 통일신라로 복속된 두 사찰은 과연 어떤 시간을 걸어왔을까,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졌다.
백제의 시간, 갑사로 가는 길
철당간과 대적전의 원금당지
같은 계룡산 기슭에 231년이라는 간격을 두고 지어진 갑사와 신원사 중에 먼저 갑사를 찾았다. 계룡산 자락을 따라 굿당 간판들이 점점 많아지고, 갑사에 가까워질수록 가로수 은행잎이 벌이는 황금빛 축제가 더욱 화려해졌다.
갑사는 ‘하늘과 땅과 사람 가운데서 으뜸간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추갑사(秋甲寺)’라는 별칭도 있는데, 과연 이름에 걸맞게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문에 들어서자 계룡8경 중 6경이 펼쳐지면서 오리숲길의 단풍 절경이 절로 탄성을 부른다. 느티나무, 참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등 150년 넘은 고목들이 즐비하고, 사이사이 빨강 단풍잎들이 꽃보다 더 곱다.
갑사 경내에는 202종의 식물(2015년 기준)이 자생하고 있어, 국립공원관리공단이 〈갑사 경내 식물지표도〉를 따로 만들었을 정도다. 왕벚나무, 향나무, 병꽃나무, 오동나무 등의 우리 나무와 고유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물창고로 부족함이 없다.
갑사 입구에서 경내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크게 세 갈래로 나누면,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른쪽 계곡을 건너 대숲 길을 따라서 대적전(大寂殿)으로 가는 길이 그 하나요, 일주문에서 사천왕문을 거쳐 오리숲길을 따라서 경내로 들어가는 산책길이 그 둘이다. 그리고 왼쪽 산 아래 부도전과 사적비 옆을 지나 경내로 들어가는 찻길도 운치 있고 아름답다. 세 개의 길 모두 의미가 있으니, 마음을 내려놓고 천천히 걸어보기를 권한다.
대적전 가는 길은, 1,600여 년 전 백제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대적전 자리에 본래 본존불을 모시는 금당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젓한 대숲 길에서 하늘 높이 솟구친 통일신라 때(680, 문무왕 2)의 철당간(보물 제256호)을 올려다보면 마음이 겸허해지기 마련이다. 국내에서 가장 높고(높이 15미터), 딱 하나만 남은 통일신라의 당간은 문화재로 가치가 매우 높다. 안타깝게 1893년(고종 30) 철당간의 네 마디가 유실되고 28마디만 남아서 대웅전 쪽을 바라보고 있다.
철당간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서면 이 옛길의 목적지 대적전이 나온다. 앞면과 옆면이 두루 세 칸씩인 팔작지붕의 대적전은 내부 단청이 우아하고 고풍스럽다. 정면 어간에 걸린 현판 글씨(道光6年4月牧岩書)가 1826년(순조 26)에 건립되었음을 말해준다.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충남도유형문화재)과 세 점의 수수한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대적전 오른쪽에 ‘쇠시리(기둥의 모서리나 창살의 등을 깎아 밀어서 두드러지거나 오목하게 모양을 냄)’ 원형 초석이 남아 있다. 본존불을 모신 금당이었다는 표식이다. 대적전 앞마당에는 독특한 형태의 승탑(보물 제257호), 부도 한 기가 서 있다. 고려시대 양식의 팔각원당형에 연꽃연화문, 주악천인상 등을 새긴 섬세한 조각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유서 깊은 대적전과 화려하고 중후한 고려 승탑, 오랜 풍상에 씻긴 듯 말갛게 서 있는 배롱나무의 조화가 다른 세상인 듯 한 걸음 멀어진다. 적멸의 세계가 여기인가 싶다. 원금당지는 빼어난 정취에 비해 대웅전과 떨어진 외진 곳이어서 한적하다.
시대를 넘어선 불교문화 한눈에
백제 천진보탑, 조선조 삼신불괘불탱
천진보탑(天眞寶塔)은 갑사 경내지에서 산중으로 가장 깊숙이, 가장 높은 곳에 솟아 있는 천연의 바위 탑이다. 고구려 아도 화상이 갑사를 세운 동기가 천진보탑에 있다. 아도 화상은 신라 땅 선산에 신라 최초의 절 도리사를 짓고 고국 고구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계룡산 산중에서 상서로운 빛이 나와 하늘까지 뻗쳐 오르고 있었다. 빛의 발원지를 찾아가 보니 천진보탑이었다. 아도 스님은 탑에 참배하고 그 아래 절을 지었다.
천진보탑까지 가는 길은 갑사 구곡의 풍광을 즐길 수 있는 산책길이다. 오리숲길을 따라 삼불봉(三佛峰)을 향해서 오르면 대성암, 용문폭포, 신흥암이 근처에 있고, 신흥암 위쪽 산봉우리처럼 우뚝 솟은 자연 돌탑이 천진보탑이다.
갑사는 그 뒤 556년(위덕왕 30) 혜명 대사가 천불전과 보광명전, 대광명전을 중건하는 등 여러 번 불사가 있었다. 하지만 679년 의상 대사가 당우 천여 칸을 짓고, 화엄대학지소를 창건하면서 비로소 화엄 십대사찰로 자리 잡는다. 이때 계룡갑사를 갑사로 바꾼다. 조선조에 전국적인 사찰 통폐합(1423, 세종 6)이 시행될 때도 다행히 제외되어 도량을 지킬 수 있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갑사 전각이 모두 불타버렸고, 1604년(선조 37) 대웅전과 진해당을 중창하면서 새롭게 단장한다. 1654년(효종 5)과 1875년(고종 12)에 중건해서 현재 대웅전, 관음전, 대적선원, 대적전, 보장각, 삼성각, 지장전, 진해당, 적묵당, 종각, 응향각, 팔상전, 표충원, 향적당 등이 남아 있다.
갑사에는 천육백 년간 지켜온 문화재가 무척 많다. 국보 제298호 삼신불괘불탱, 대웅전(보물 제2120호), 대웅전 소조삼세불 및 사보살상(보물 제2076호), 복장전적(보물 제2077호), 대웅전 석가여래삼세불도(보물 제1651호), 동종(보물 제478호), 선조2년간월인석보판목(보물 제582호), 승탑(보물 제257호), 철당간 및 지주(보물 제256호) 등, 절 경내가 박물관과 다름없다. 그 밖에도 강당, 대적전, 대적전목조삼존불, 사적비, 석조보살입상, 석조약사여래입상 등의 충청남도유형문화재와 삼성각, 중사자암지삼층석탑, 천진보탑, 팔상전, 표충원 등의 문화재자료들이 경내 곳곳에서 ‘으뜸 절 갑사’의 면모를 받쳐주고 있다.
갑사 동종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두 번이나 수난을 당했다. 조선 초기 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주조한 종(약 5.14톤)은 1583년(선조 11) 여진족 침입 때 녹여서 무기로 만들었다. 1584년 신라와 고려 종의 형태와 양식에 맞게 지금의 종을 다시 만들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또 공출당했다. 광복한 뒤에 인천에 있던 것을 겨우 되찾아왔다.
전각과 불상, 탱화도 보물인
갑사 대웅전
갑사 대웅전 현판에는 ‘康熙八年己酉六月日書’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대웅전(보물 제2120호) 건물이 지어진 해는 1604년인데, 현판은 ‘강희 팔년’, 1669년(헌종 10) 새로 쓰였다.
1875년(고종 12)에 보수해서 오늘날까지 내려온 대웅전은 우물천장으로 되어 있다. 불단에는 석가여래를 주불로 한 소조삼세불과 사보살상(보물 제2076호), 즉 일곱 위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들은 1617년 봉안되었다. 석가여래의 후불탱화인 석가여래삼세불은(보물 제1651호)는 1730년 제작되어 18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불화로 인정받고 있다.
갑사 대웅전처럼 건물을 비롯해서 내부의 불상과 후불탱화까지, 세 가지가 보물로 지정된 경우가 또 있을까? 국내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갑사 대웅전 석가여래를 주불로 한 소조삼세불과 사보살상(보물 제2076호)
임진왜란 첫 승병장 영규 대사와
승병 800여 명의 순국
갑사는 호국사찰로도 불린다. 임진왜란 때, 갑사에서 출가한 기허당(騎虛堂) 영규 대사(靈圭大師)가 갑사를 근거지로 삼아서 승병 1천 명을 모으고,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왜군과 싸웠다. 영규 대사는 서산 대사 휴정(休靜)의 제자로, 갑사 청련암에서 수행할 때 지팡이로 무예를 익혔는데 그 실력을 따라올 자가 없었다. 1592년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성과 금산전투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2차 금산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승병 800명, 의병 700명과 함께 순절하고 말았다.
영규 대사의 이런 활약은 그간 불자들조차 모를 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금산 칠백의총 관련 공식 기록에도 의병 700명의 죽음만 있을 뿐, 승병 800명의 존재는 가려져 있었다. 나라를 위해 흔쾌히 목숨을 버렸지만 존재조차 지워졌던 이름 없는 의병 스님들. 늦게라도 갑사 표충원의 영규대사대제가 그분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
영규 대사 영정과 함께 휴정(休靜) 서산 대사, 유정(惟政) 사명 대사의 영정도 모셔져 있는 표충사는 대웅전에서 볼 때 오른쪽 맨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갑사 입구에서 왼쪽 찻길을 따라 경내로 올라가면서 부도전도 둘러보고, 갑사사적비 주변에 서린 맑고 강한 기운도 받으면서 걸으면 표충원에 도착할 때쯤이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질 것이다.
계룡산 남쪽 신원사와
중악단 산신각
계룡산 신원사(新元寺)는 백제 말인 651년(의자왕 11), 고구려 승려 보덕 화상(?~?)이 창건했다. 당시 보덕 화상은 고국인 고구려를 떠나 백제로 망명한 정치적 망명 승이었다. 열반종의 개산조로서 고구려 보장왕(재위 642~668)의 국사였던 그가 망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보장왕이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멀리하자 이를 걱정해서 여러 차례 간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망명을 결심한 보덕 화상이 방장(方丈)을 날려 하룻밤 사이에 백제의 완산주(지금의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고구려는 보덕 화상이 떠나오고 나서 17년 뒤, 당나라에 항복했다. 백제는 그보다 먼저 660년,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보덕 화상은 신원사 자리에 불가사의한 기가 서려 있다며, 이곳에 절을 지었다. 그렇게 절을 짓고 열반경을 강설하는 등, 백제와 신라에 두루 이름을 날리니, 원효 스님과 의상 스님도 법을 들으러 왔다고 한다.
신라 말, 도선 국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법당만 남은 절을 중창했고, 1298년(충렬왕 24)에 무기 스님이 중건했다. 조선 후기에는 무학 스님이 영원전을 짓는 등 중창했고, 1866년(고종 3) 심상훈 관찰사가 중수하면서 신정사에서 신원사(神院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1876년(고종 13)에는 명성황후의 명을 받고 보연 스님이 중건, 한자를 ‘神院寺’에서 ‘新元寺’로 바꾸었다. 대한제국의 신기원을 연다는 뜻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고종 황제와 명성 황후의 간절함이 느껴진다.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대웅전
앞면 세 칸 옆면 세 칸 규모의 신원사 대웅전(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80호)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시고,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배치했다. 불단 오른쪽에 신원사 창건주와 중창주인 세 스님(도선·보덕·무학)의 진영을 모셔 놓은 것도 특이하다. 현재 건물은 1906년에 일봉 화상이 다시 지은 것을 1946년 만허 화상이 중수했다고 한다.
대웅전 앞마당의 진신사리탑에는 7과의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셔 놓았다. 신원사 노사나불괘불탱(국보 제299호)은 1644년(인조 22) 완성된 불화로, 길이 11.18미터, 폭 6.88미터의 크기이다. 삼베 바탕에 채색을 하는 등, 17세기 중엽의 불화양식이 잘 드러난다는 평을 받는다.
대웅전을 마주 보고 오른쪽으로 50미터쯤 올라가면 산악신앙 제단인 ‘중악단 산신각(보물 제1293호)’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국가가 산신제를 지내는 제단이다. 1394년(태조 3) 무학 대사가 지은 왕실 기도처로, 1651년(효종 2) 폐사되었다가 1879년(고종 16) 명성 황후가 원을 세워 재건했다. 궁궐 양식을 그대로 축소한 조선 말기의 우수 건축물로 꼽힌다. 산신각에 산신도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6일 산신제를 지낸다. 첫 번째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 마루 벽에 명성 황후 사진이 큰 사진틀에 들어서 걸려 있다.
중악단 주차장 한쪽에 오층석탑이 서 있다. 신라 석탑 양식의 고려시대 탑인데, 1975년 보수할 때 당나라 동전과 개원통보, 사리함 등이 나왔다.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31호다.
신원사 고왕암(古王庵)은 660년(의자왕 21)에 창건한 부속 암자다. 1419년(세종 1)과 1928년에 중건했다. 고왕(古王)이라는 이름은 당나라 소정방과 신라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이곳에 피난해 있던 백제 왕자 융(隆)이 신라군에게 항복함으로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신원사 대웅전(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80호)과 진신사리탑
신원사 대웅전 주불인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진신사리탑에는 7과의 석가여래 진신사리를 모셔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