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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정은우의 우리 곁에 오신 부처님

열암곡 마애여래입상(列岩谷 磨崖如來立像)

  • 입력 2023.01.02

5cm 기적에서 우뚝 솟아 일어나는 용현불로 

 

열암곡 마애여래입상

2007년 5월 22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경주 남산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5m가 넘는 마애여래좌상이 남산의 해발 494m 고위산 열암곡에서 넘어진 채 발견된 것이다. 암반과 마애불의 코 사이의 거리 때문에 5cm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 마애불의 발견은 시민들의 문화유적에 대한 관심 그리고 경주시의 연속적인 남산 조사의 정책이 함께 이루어낸 결과였다. 2005년 10월 23일 남산의 문화유적을 답사하던 등산객, 임희숙과 배만수씨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3호로 지정된 열암곡 석조여래좌상의 불두를 발견하였다. 이를 계기로 경주시는 열암곡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정비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뢰하여 석조여래좌상에 대한 정비계획을 세우고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석조여래좌상에서 남동쪽으로 3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또 대형 마애불이 발견된 것이다. 당시, 이 마애불은 30°정도 경사진 산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면이 바닥으로 향한 채 앞으로 넘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 마애불은 위에서 보면 마치 편평한 바위 같아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지 전혀 모르는 모습으로 발견되었으니 불상이 조성된 지 거의 12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부처님의 큰 가피가 아닐 수 없다. 이 마애불은 안전을 위해 임시 보호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마애불은 왜 넘어진 채 발견되었을까? 그리고 언제 어떻게 넘어졌을까? 이에 대한 여러 의견이 있으나 공통된 점은 경주지진이다. 경주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지진이 계속 이어졌다. 779년(혜공왕 15)의 경주 대지진이 잘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1430년(세종12)에 있었던 경주지진의 타격이 가장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애불의 제작시기를 감안하면 조선시대의 경주 대지진 당시 마애불이 넘어졌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무게 80톤의 이 마애불이 넘어질 정도면 우리가 체감한 2016년 9월 12일의 경주지진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마애여래입상은 거의 600년 동안 넘어진 이 상태로 있었던 것이 된다. 그리고 발견된 이후 현재까지 거의 15년 동안 역시 같은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2007년 발견 당시의 열암곡 마애여래입상


보호각 안에 봉안된 열암곡 아애여래입상(현재)


현재 머리 위쪽 끝부분과 허벅지 부분만 암반과 돌덩이에 닿아 여래상을 지탱하고 있어 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다. 그동안 다양한 전문가들이 세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으나 좁은 산길에 중장비를 실은 대형차가 올라갈 수도 없어 오늘날의 최첨단 과학과 기술력으로도 뾰족한 해결책은 없는 상태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 또한 신비로운 일이니 그 자체를 신격화해야 된다는 의견과 마애불을 바로 세워 불격을 세워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은 2021년 10월 31일 총무원장 진우스님을 중심으로 문화재청, 경주시 관계자 및 불교신자들이 모두 함께 열암곡 마애불 앞에서 불상 바로 세우기 운동을 알리는 고불식을 진행하여 결의를 다진 바 있다. 

남산에서 이 마애불을 친견하러 가는 길은 매우 멀다. 경주시 내남면 노곡2리 마을회관에서 백운암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면 열암곡이 있으며, 이곳에서 다시 800m 정도 오르면 절터에 이르게 된다. 열암곡은 경주 남산 남동쪽 끝단의 백운계(白雲溪)의 한 골짜기로 열암곡 만이 아니라 백운곡, 양조암곡, 심수곡 등의 절터가 많이 남아 있다. 불상이 발견된 곳은 열암곡 제3사지로 동서 15m, 남북 11m 정도의 평평한 대지에 형성되어 있다. 전체적인 절의 규모는 동서 32m, 남북 31m에 달한다. 건물의 초석들과 넘어지고 깨진 불상의 부재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어 곧 절터임을 직감하게 된다. 현재는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잘 정리되어 있다. 

2021년 10월 31일, 마애불 앞에서 불상 바로 세우기 운동을 알리는 고불식을 진행하였다.


마애여래입상은 무게 약 80톤, 너비 250cm, 두께 190cm, 높이 620cm의 화강암 한 면에 높은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다. 마애불상의 크기는 460cm, 연화대좌가 100cm로 전체 높이 560cm에 이르는 대형불이다. 발견 당시 여래상의 머리 위쪽 끝부분과 지면이 5cm 떨어져 다행하게도 얼굴은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대부분의 석불들이 넘어지면서 얼굴이 마모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대부분이니, 참으로 신기하고 경이로운 일이다.  

이 마애불의 특징은 봉긋 솟은 육계와 머리카락의 표현이 없는 민머리, 신체에 비해 큰 네모진 얼굴과 신체가 짧은 비례, 편단우견의 대의, 가슴에 표현된 탄력있는 양감, 5개의 큰 단엽으로 구성된 올림연꽃 그리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서있는 여래입상이 편단우견 대의를 입은 작품은 많지 않은데 경주 남산 삼릉계 마애선각여래입상과는 편단우견의 대의 및 손 모습, 만든 시기까지도 비슷하다. 
옷주름은 편평하면서도 반복적으로 흘러내리면서 일률적으로 접혀 있다. 옷주름의 표현은 얼굴과 더불어 넘어져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마애불 감상의 주된 포인트이다. 오랫동안 누운 채 외부와 접촉하지 않은 상태여서인지 측면에서 바라보는 옷주름에는 거칠게 쪼은 돌의 질감이 잘 남아 있다. 거칠면서도 강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화강암과 정으로 쪼은 그 질감은 한국적 아름다움이기도 하고 실내가 아닌 경주 남산에 있어 생명력 있는 실재감이 더 크게 다가온다. 현재 얼굴 형태 및 마애불의 신체 비례, 불상의 입체감이나 자연스러움이 감소된 옷주름 등에서 이 마애불은 8세기 말에서 9세기 초엽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열암곡 마애여래입상의 백미는 곧게 뻗은 뾰족한 코에 도톰한 입술에서 풍기는 도도하면서도 귀족적인 얼굴이다. 특히, 발견 당시부터 유명했던 높은 콧대는 성형으로도 어려울 정도로 곧고 아름답다. 또한 손가짐(수인)과 손톱까지 세밀하게 조각한 두툼한 손가락도 독특한데, 왼손은 왼쪽 가슴에 놓고 오른손은 오른쪽 다리 위로 내렸다. 비슷한 손모습을 한 여래입상들이 8-9세기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되었는데 석가불 또는 아미타불이 짓는 손으로 추정하고 있다. 

손가짐(수인)과 옷주름


경주 남산에는 열암곡 마애여래입상만이 아니라 860cm의 약수계 마애여래입상, 521cm의 삼릉계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등 5m가 넘는 대형 불상들이 특히 9세기에 많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장육존상은 한 사람의 발원에 의해 만들기 어려운 대불사로, 급변하는 시대였던 9세기 신라 왕실과 당시 새로운 정권의 왕권강화를 위한 불교정책 등의 정치적 의미가 내포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신성한 땅이자 우수한 화강암을 보유한 경주 남산, 솜씨 좋은 석장을 보유한 신라의 수도 경주,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충만한 신앙심이 합쳐져 거대한 불상들이 경주 남산에서 조성되었다.  
 
신라인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신심으로 제작한 그 마애여래입상, 이제 <열암곡 마애불 바로 세우기 운동>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 되었다. 이에 조계종 총무원을 비롯하여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재청, 경상북도, 경주시가 같은 마음, 한뜻으로 움직이고 있다. 자연풍화로 점점 약해지고 있을 천년이 넘은 마애불을 한치의 훼손 없이 우뚝 솟게 하기 위해 이제 대한민국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마애불의 원래 위치는 현재의 장소가 아닌 바위돌이 지표면에 드러난 그 윗부분으로 추정하고 있다. 언제인가 아무런 훼손 없이 원래 세웠던 성스러운 그 장소에서 아름다운 얼굴로 우뚝 솟아 있을 그 날을 고대한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쓰여 있는 부처님이 보살도를 닦은 시절 세운 대서원, 높이 솟아올라 나타난 용현불(湧現佛)처럼 스스로 증명하실 그 날을 기다린다. 



 

정은우 (부산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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