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모니부처님은 나무와 인연이 깊다. 무우수 아래에서 탄생하고 염부수 아래에서 사색에 잠겼으며,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숲에서 태어나 숲에서 깨달음을 얻고, 숲에서 열반에 드셨다.
그래서인지 불교도 숲과 관계가 깊다. 천 년 사찰은 오래된 숲을 품고 있고, 오래된 숲은 사찰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준다. 많은 숲이 ‘발전과 편리’를 핑계로 하루가 다르게 훼손당할 때, 사찰은 햇살과 바람과 함께 숲을 가꾸고 지켜냈다. 그 울창한 숲에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사람들이 찾아온다. 숲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어루만져 치유해준다. 2023년 계묘년, 천 년 사찰의 깊은 숲길에서 만나게 될 우리 자신을 응원하며, 길을 나섰다.
산문 입구에서 시작되는
‘천은사 상생의 길’
지리산은 우리나라 산 가운데 가장 품이 넓어 3개 도의 6개 군에 걸쳐 있는 신령스런 산이다. 최고봉인 천왕봉 정상이 1,915.4미터로, 남한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다. 방장산, 두류산, 삼신산이라고도 불리며, 1967년 국내 최초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화엄사, 쌍계사와 더불어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인 천은사는 지리산 서남쪽(전남 구례군 광의면 노고단로 209/ 방광리 70번지)에 자리 잡고 있다. 노고단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차일봉을 이루고 더 내려와 일으킨 옥녀봉의 아래쪽 길지인데, 창건 당시 이름은 감로사(甘露寺)였다.
‘천은사 상생의 길’은 이른바 천은사 둘레길이다. 누림길과 보듬길, 나눔길로 나뉜 총 3.3km의 산책길로, 그 가운데 천은사 소나무 숲길은 나눔길에 속한다. 상생의 길은 2019년 4월 29일, 30년간 갈등을 빚어온 천은사 문화재관람료가 폐지되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2020년 12월 개방되었다. 2021년과 2022년, 2년 연속 한국관광공사 주관 ‘안심 관광지’에 선정되었고, 전라남도가 ‘걷고 싶은 전남 숲길’로 선정하면서 점차 알려지는 추세다.
코스를 알려주는 그림과 글씨 등의 안내판이 제각각 달라 참고하면 세 가지 길을 구분하려 하면 혼랍스럽기만 하다. 2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으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누림길을 걸어 산문 입구쪽으로 다시 내려와서 ‘천은저수지 제방~수류관측대~심원암~감로암~수홍루~소나무 숲길~천은사 참배’의 순서로 걸으면 된다.
누림길(1.1km)과 보듬길(1.2km)은 천은사 일주문 밖인 천은저수지 둘레길이고, 나눔길(1km)은 천은사 수홍루에서 시작해서 절을 중심으로 바깥쪽을 한 바퀴 도는 소나무 숲길이다. 가장 효율적인 순서는 주차장에서 부도전 앞 ‘지리산 천은사’ 편액이 걸린 일주문으로 올라와서 수홍루를 거쳐 소나무 숲길을 돌고, 법당에 참배한 다음, 보듬길로 내려가면서 반대쪽으로 저수지를 한 바퀴 돌아서 주차장으로 올라오는 방법이다.
천은저수지 둘레를 도는 누림길과 보듬길, 수변 산책로는 저수지 가장자리에 나무데크를 깔아놓아서 걷기도 편하고, 걷는 내내 저수지 맞은편 경치를 즐길 수 있어서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저수지 주변 소나무들이 남쪽을 향해 굽은 모습과 물에 비친 소나무 그림자,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에 햇빛이 반사되어 은빛으로 일렁이는 물결에 마음을 빼앗기면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
보물 지정 앞둔 ‘지리산 천은사’ 일주문,
무지개 드리우는 아름다운 수홍루
천은사(泉隱寺)는 산문과 일주문이 따로 있다. ‘方丈山 泉隱寺(방장산 천은사)’라는 편액이 걸린 산문은 주차장 아래쪽 산 초입에 있어서 지나치기 쉽고, ‘智異山 泉隱寺(지리산 천은사)’라는 현판이 달린 일주문은 주차장에서 수홍루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다.
18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주문 현판은 세로 두 줄로 씌었는데, 세로줄로 쓰인 편액은 국내에 단 하나뿐이다. 단칸 팔작지붕의 석재로 된 문 지방석이 주기둥 사이에 있는 일주문으로도 유일해서, 머잖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될 예정이다.
특히 조선시대 4대 명필가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쓴 이 편액은 절 이름이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 단유 선사(袒裕禪師)가 1679년 절을 중수하면서 절 이름을 감로사에서 천은사로 바꿨는데, 그 이유는 이러하다. 당시 감로천 샘가에 큰 구렁이가 자주 나타났다. 사람들이 무서워하자 한 스님이 용기를 내서 구렁이를 잡아 죽였다. 그러자 그 때부터 감로천에서 물이 솟아나지 않았다. 그래서 ‘샘이 숨었다’는 뜻의 ‘천은사’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런데 화재가 계속 일어나는 등 절에 이런저런 불상사가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던 이무기를 죽인 탓이라는 말이 돌았다.
이광사가 이 말을 듣고 물이 흘러 떨어질 듯한 필체로 ‘지리산 천은사’라고 써주면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면 불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과연 그 말대로 했더니 그 뒤로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새벽녘 조용한 시간에 일주문에 귀를 기울이면 글씨에서 물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로써 천은사는 일주문까지 포함해서 보물 7기(극락보전 아미타후불탱화, 괘불탱, 금동불감, 삼장보살도, 목조관세음보살좌상 및 대세지보살좌상, 극락보전)를 갖춘 유서 깊은 사찰이 되는 것이다.
일주문 오른쪽 산기슭에는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부도전이 있다. 11기의 부도와 3기의 부도비가 고즈넉한데, 낮은 담과 작은 출입문을 갖추고 있어 보는 마음이 쓸쓸하지만은 않다. 용담 대화상과 월봉당 유운 선사, 영해당 해조 선사 등이 모셔져 있다.
일주문에서 천은사 경내로 들어가는 계곡에 조선 후기에 지어진 아름다운 다리와 누각이 있다. 수홍루(垂虹樓), 풀이하자면 무지개가 드리운 누각이란 뜻이다. 크기는 작지만 2층으로 된 수홍루는 건물도 아름답지만 계곡과 어울린 주위 풍광이 사시사철 빼어나다. 이른바 천은사의 핫플레이스로 연인들 사진 찍는 장소로 인기가 높다. 특히 2018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 장소로 더 유명해졌다. 주인공 애기씨(고애신, 김태리 역)와 약혼자였던 김희성(변요한 역)이 마지막 작별을 나눈 곳이다. 천은사를 와본 사람들이 금강송 소나무 숲길과 수홍루를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손꼽는다.
겨울에 더 푸른 야생 차밭과
천은사 지킴이 소나무 숲길
수홍루를 건너면 비로소 소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도는 방향에는 차이가 없지만, 절에서 알려주는 대로 탑돌이를 하듯, 왼쪽으로 돌기로 했다. 불교용품을 파는 ‘불심원’ 못미처 ‘감로천’이 눈에 띈다. 감로사 구렁이 전설의 그 샘터 자리는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재현해놓은 것이라고 한다.
감로천을 지나 오른쪽 산 옆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천은사 황토색 담장을 따라 길이 잘 깔려 있다. 왼쪽 산언덕에 드문드문 야생 차나무와 훌쩍 키 큰 소나무들이 줄을 서기 시작한다. 성급한 동백꽃 봉오리 하나가 고개를 떨구고 있다. 천은사 수장고와 회승당, 명월료, 삼성전이 오른쪽 담장 너머로 이어지다가, 관음전 뒤쪽에서 천은사 담장이 끝이 난다.
절 담장이 끝난 곳, 절 바깥 빈터에 굵은 소나무 대여섯 그루가 무리를 지었는데, 그 중에 우아하고 기품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띈다. ‘천은사를 지키는 소나무’라는 안내문에 2011년 10월 31일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3백 살짜리라고 적혀 있다. 천은사 숲의 소나무들이 위로 훌쩍 큰 것에 비해 몸통이 가늘다 싶었는데, 그 소나무 안내문을 보고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천은사 주변에는 1950년대 말까지 수백 년된 소나무들이 즐비해서 하늘이 안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1960년대 초에 대부분 벌채를 당하고, 지금은 그 뒤에 자란 나무들이 남았다고 한다.
보호수 소나무에 집중한 사이, 새소리와 물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왼쪽 산비탈의 차밭이 점점 자리를 넓혀가는데, 그 위쪽의 견성암은 더욱 한적해 보인다. 다시 새소리와 물소리가 커지더니, 오른쪽으로 대숲이 이어진다. 대숲에서 새떼가 부산을 떨고, 그 새소리와 대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고요를 깬다. 길을 더 올라가자 지그재그로 굽은 이름 없는 나무다리가 계곡을 가로질러 널찍하게 서 있다. 한층 물소리가 기세를 올린다. 감로사라는 예전 이름에 걸맞게 겨울 가뭄에도 계곡물의 양은 아주 적은 편은 아니다.
개울을 건너자 이제 너덜겅(돌이 많이 깔린 비탈) 산길이다. 넓적한 돌들이 텃밭만 하게 펼쳐져 있는데, 그 틈새에서 야생 차나무들이 기를 쓰고 뿌리를 내렸다. 그 놀라운 생명력이 감탄스럽다. 너덜겅 위쪽으로는 더 올라갈 수 없다. 탐방로의 끝, 울타리와 함께 출입금지 팻말이 앞을 가로막는다.
명상쉼터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걷는데 길바닥이 온통 노랗고 폭신하다. 비로소 금강송 소나무 숲길이 시작된다는 신호처럼, 숲 바닥이 노란색 솔잎으로 융단을 깐 것 같다. 어느 방향에서 올라와도 중간 지점인 명상쉼터는 나무의자 서너 개가 설치되어 있는 휴식 장소다. 소나무 숲길에서 숨찰 일은 없지만, 잠시 분주한 마음을 비우고 ‘숲멍’을 하기에는 제격이다.
송림암(松林庵)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은 그저 온통 소나무들이다. 마치 코끝에 차향을 품은 소나무 향기가 배어 버릴 것만 같다. 오르막도 내리막도 별로 없고 길도 편해서 심심할 정도다. 메마른 흙빛 겨울나무들 사이로 키 작은 차나무들이 푸른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다만 하늘을 가린 소나무숲 틈새로 햇빛이 반짝일 때 훔쳐보듯 바라보는 천은사 경치는 정말 일품이다.
금강송 소나무 숲길의 마지막 방점은 송림암 들어가는 길 분위기에 찍는다. 노란 솔잎이 깔린 황금빛 바닥과 길 양쪽에 호위하듯 줄지어 선 금강송의 맑은 기운이 온몸을 상쾌하게 흔들어댄다. 송림암 현판과 나란히 걸린 은월당(隱月堂)이란 편액이, 그 뜻의 깊이가 더욱 신비롭다.
천은사의 비경, 방장선원
천은사는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인도의 덕운 스님이 감로사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이어 875년 연기 국사가 중창했고, 이후 1610년(광해군 2)에 혜정선사(惠淨禪師)가 소실된 가람을 중창해서 선찰의 명맥을 이어갔다. 1679년(숙종 5)에 단유 선사가 절을 크게 중수하면서 천은사(泉隱寺)로 개칭했다. 이후 1774년(영조 50) 5월, 혜암 선사(惠庵禪師)가 전각을 중수하면서 절을 새롭게 중창, 지금의 가람은 대부분 이때 복원된 것이라고 사적기에서 소개하고 있다.
천은사의 금당은 극락보전이다. 극락보전으로 가기 위해 수홍루를 지나 천왕문으로 들어간다. 앞쪽 정면에 보이는 보제루가 매우 단아하다. 강당 형식의 건물인데, 법요식 집회 장소와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실로 쓰인다.
천은사 극락보전은 1774년 혜암 선사가 중수한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관음, 대세지 보살이 협시로서, 삼존불을 봉안했다. 다포 양식의 화려한 건물로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 규모인데, 조선 후기 목조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극락보전 현판 글씨는 일주문 현판을 쓴 원교 이광사가 썼다.
천은사에서 가장 한적하고 경치 좋은 곳은 방장선원이다. 현재는 템플스테이 수련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본래 서슬 푸른 선승들의 수행처인 선원으로 그 유서가 깊다. 극락보전과 같은 해(1774)에 초창되어 1924년 개보수했다. ㄴ자형에 정면 7칸, 측면 5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사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오랫동안 선원으로 쓰여서인지 그 기운이 칼칼하게 맑다. 그 앞 청류계곡과 어울려 수홍루에 버금가는 절경을 빚어낸다.
천은사 템플스테이는 체험형과 휴식형으로 운영된다. 체험형은 매월 둘째, 넷째 주말에 1박 2일로 진행되고, 휴식형은 연중 언제든 참여할 수 있다. 천은사 템플스테이는 방장선원을 수련관으로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도 비교 대상이 없는, 최고의 환경으로 손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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