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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이미령의 본생경 이야기

갈대 속이 텅 빈 사연

  • 입력 2023.02.15

삽화 | 견동한


옛날 어느 우거진 숲에 연못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못 속에는 무시무시한 귀신이 살고 있어서 누군가 물을 마시러 연못 가로 내려오면 물속으로 끌고 들어갔지요. 귀신에게 풀려난 이는 사람이건 동물이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한편, 연못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 몸 크기가 새끼 사슴 정도 되는 우두머리가 이끄는 원숭이 무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팔만 마리나 되는 원숭이들은 현명한 우두머리의 보살핌과 지도 아래 하루하루가 편안하고 행복했습니다. 원숭이 우두머리는 늘 이렇게 일렀습니다.

“이 숲에는 독 나무도 있고 사악한 귀신이 살고 있는 연못도 있다. 혹시 지금까지 먹어본 적 없는 열매나 마셔본 적 없는 연못물을 마실 때에는 내게 먼저 물어봐야 한다. 알겠지! 잊지 말아라.”

우두머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는 원숭이 무리는 그 말을 염두에 두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원숭이들이 숲 속 깊은 곳까지 나가게 되었지요. 온종일 나무를 타고 다니느라 목이 말랐는데 바로 그 연못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물이다!”

하지만 우두머리의 당부를 잊지 않았던 원숭이들은 타는 듯한 갈증을 참으며 우두머리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원숭이 우두머리가 무리를 따라오자 그들이 말했습니다. 

“대장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목이 마릅니다. 하지만 저 연못물은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어서….”

“잘 했다. 아주 잘 했어.”

우두머리는 원숭이무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연못 주변을 살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발자국들이 연못 쪽을 향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었으니, 돌아서서 올라온 발자국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원숭이 우두머리는 직감했습니다.

‘이 연못에는 생명을 잡아먹는 악귀가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누구라도 이 연못으로 내려가 물을 마시려 든다면 십중팔구 그 귀신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우두머리는 무리에게 알렸습니다. 

“너희는 저 물을 마시러 내려가지 말라. 물속에 귀신이 우리 목숨을 노리고 있다.”

한편, 귀신은 수많은 원숭이들을 발견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올랐습니다. 원숭이 고기로 배를 채울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원숭이는 단 한 마리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물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귀신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물 밖으로 솟아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란 끔찍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요. 시퍼런 배에 창백할 정도로 새하얀 얼굴, 게다가 손과 발은 시뻘갰습니다. 소름이 끼치는 모습을 드러낸 귀신이 소리쳤습니다.

“이것 봐! 원숭이들아!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거야? 빨리 이리로 내려와서 물을 마시란 말이야.”

원숭이 우두머리가 짐작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건넸지요.

“그대는 이 못에 살고 있는 나찰 귀신이로군.”

“그렇다.”

“그대는 연못에 물을 마시러 다가가는 자들을 붙잡았지?”

“맞다. 이 손으로 붙잡았다. 작은 새를 움켜잡듯이 연못으로 내려오는 자를 대번에 붙잡았지. 그 누구도 내 손아귀에서 벗어난 자가 없었다. 너희는 내게 안 잡힐 것 같은가? 천만에. 어서 이 연못으로 내려와 물을 마셔라. 물론 너희는 갈증을 해결하기도 전에 내게 잡아먹힐 거지만 말이다.”

음산한 목소리로 귀신이 겁을 주었는데 원숭이 우두머리는 태연하게 답했습니다. 

“저런, 저런! 우리는 너한테 잡아먹힐 생각이 없는 걸.”

“그래? 하지만 난 지금 너희가 얼마나 갈증이 심한지 잘 알고 있거든.”

“맞아. 우린 물을 마실 거야. 그렇지만 네 생각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귀신이 순간 어리둥절해졌습니다.

“연못으로 내려오지 않고 대체 어떻게 물을 마신다는 건가?”

“연못 둘레를 좀 보라구! 갈대가 저리도 많잖아. 우리 팔만 마리 원숭이가 각각 갈대 줄기를 가져와서 푸른 연꽃 줄기로 물을 마시는 것처럼 네 연못에 꽂고서 물을 마실 거다. 그러면 우린 연못으로 내려가지 않고도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고, 너는 우리를 절대로 잡아먹지 못할 거야.”

원숭이 우두머리는 이렇게 말하고서 갈대 줄기 하나씩 가지고 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온 마음으로 ‘10바라밀’을 떠올렸지요. 마음을 바라밀에 집중하고서 다시 ‘진실한 맹세’를 떠올렸습니다. 그 마음으로 원숭이들이 내미는 갈대를 받아들고 입으로 불었습니다. 그러자 갈대 속에 있던 것들이 밖으로 날아가 속이 텅 비어버렸지요. 

하지만 8만 마리나 되는 원숭이들의 갈대를 일일이 다 불 수는 없었기에 우두머리는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생각했습니다. 

“이 연못을 에워싸고 자라나 있는 갈대는 전부 그 속이 텅 비기를!”

이렇게 간절하게 생각하자 연못의 모든 갈대가 속이 비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연못가의 갈대는 다 속이 비게 되었지요. 

이제 8만 마리 원숭이들은 각각 속이 빈 갈대를 하나씩 가지고서 연못을 빙 둘러 에워싸서 앉았습니다. 우두머리가 갈대로 물을 빨아서 마시자 모두 따라서 갈대로 물을 빨아 마셨습니다. 연못 속에 살고 있던 귀신은 단 한 마리 원숭이도 잡지 못했고, 크게 낙담한 채로 자신의 거처로 떠나가 버렸지요. 원숭이 우두머리인 보리살타는 맘껏 물을 마셔 갈증을 완벽하게 해결한 무리를 이끌고 자신들의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현재에 빗대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연못 속에 살고 있던 귀신은 데바닷타이고, 팔만 마리 원숭이는 붓다를 따르는 수행승들이며, 기략이 뛰어난 원숭이 우두머리는 바로 나였다.” (본생경 20번째 이야기)

 

 

 

◇◆◇

 

 

부처님 재세 시절 일입니다. 당시 수행승들이 바늘통을 만들려고 사미승들에게 연못가에 자라난 갈대줄기를 뽑아오게 했지요. 그런데 갈대줄기가 하나같이 속이 텅 비어 있는 것을 본 수행승들이 어쩐지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이 일을 부처님께 말씀드리자 ‘내가 아주 오래 전에 세운 서원(가피력) 때문에 갈대 속이 빈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고 그 배경 이야기를 위에서와 같이 들려준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실소를 금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요. 갈대 속이 텅 빈 것과 부처님이 무슨 상관일까요. 신심 깊은 분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여기며 넘어가려 합니다. 

 

다만 몇 가지를 짚어보겠습니다.

먼저, 원숭이 우두머리가 갈대 속을 비울 때 그 마음에 품었던 10바라밀입니다. 바라밀이란 완성, 성취의 뜻을 지녔습니다. 열 가지 수행을 다 마쳤다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원숭이 우두머리는 오래 전 연등부처님에게서 ‘장차 부처가 될 것’이라는 예언(수기)을 받은 보살입니다. 보살은 부처가 되는 날까지 세세생생 나고 죽기를 반복하며 윤회하면서 세상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는 사람이지요. 가진 물건을 베풀고 심지어 제 몸마저도 기꺼이 보시하고 계를 지키고 어떤 모욕이나 험난한 경우에도 인내하고 정진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구하기 위해 목숨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 아닌 동물의 몸으로도 태어나 역시 그 동물의 무리를 이끌고 돌보며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였고 위험에서 구제했습니다. 

 

사람이나 동물로 태어나서도 자신보다는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살아가는 보살은 대체로 여섯 가지 수행을 하나씩 하나씩 완벽하게 해나갑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6바라밀입니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여섯 가지를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원숭이 우두머리는 10바라밀을 떠올렸다고 했습니다. 본생경에 등장하는 10바라밀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가진 것을 아낌없이 다른 이에게 주는 보시입니다. 둘째는 계를 잘 지키는 일(지계)입니다. 셋째는 세속에서 멀리 벗어나고 떠나는 일(遠離)입니다. 넷째는 지혜를 갖추는 일이고, 다섯째는 노력, 여섯째는 인내, 일곱째는 이치를 완벽하게 꿰뚫는 일(진실)이고, 여덟째는 굳은 마음, 결심입니다. 아홉째는 자애심을 품는 일이고, 마지막 열째는 담담한 마음, 즉 평정입니다.

 

동료들의 갈증을 해결할 방법을 찾던 원숭이 우두머리는 단순히 신통력을 부려서 연못가의 모든 갈대를 오늘날의 빨대처럼 만든 것이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보살의 오랜 서원이었다는 것이지요. 그 서원이 헛되지 않아 그 힘으로 동료들의 불행을 막을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현명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도 담겨 있습니다. 목마른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물입니다. 어디에 물이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하며 물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물을 만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들이킵니다. 하지만 애타게 찾던 물을 만나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보리살타의 조언입니다. 대상에 강하게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생각지도 못한 위험에 빠져 끝내 커다란 손실을 입게 되는 것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연못에 숨어 목마른 자가 다가오면 대번에 잡아끌어 삼켜버리는 귀신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무엇인가를 끝없이 갈구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그들이 바라는 것들로 가득 차 있지요. 그렇다고 아무 것도 찾지 않고 구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있고, 인생을 좀 더 풍요롭고 여유 있게 살아가기 위해 갖춰야 할 것도 많기 때문입니다. 꼭 필요하고 갖고 싶은 것을 취하되 덮어놓고 덥석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것, 거리를 두고 갈대를 빨대 삼아 필요한 물만 취하여 갈증을 해결하고 연못을 떠난 원숭이들처럼 인생에서 꼭 필요한 것을 차분하게 추구하라는 것. 그럴 때 우리는 유혹이 넘쳐나는 세상에서도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우리를 나락에 빠뜨릴 번뇌는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원숭이를 한 마리도 잡아먹지 못하고 연못에서 도망친 나찰귀신처럼 말이지요.

 

기다리고, 거리를 두고, 딱 필요한 것만을 취할 것! 인생에서 손해 보지 않고 이익을 제대로 챙기는 세 가지 비결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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