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명품 길’로 불리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의 월정사 전나무 숲길. 월정사 일주문에서 시작해서 천왕전 앞 금강교까지 약 1킬로미터로, 황토를 다져 만든 황톳길이다. ‘천년의 숲’으로 불리는 이 숲길 왼쪽에는 한강의 지류인 오대천이 흐르고, 오른쪽에는 최소한 80년에서 최고 370년이 넘은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오대천은 《동국여지승람》 등에 한강 발원지로 소개된 두 곳, 서대 수정암의 우통수와 월정사 옆 금강연의 물이 합류하여 내려오면서 생긴 오대산 계곡이다. 현재는 태백의 검룡소가 한강의 발원지로 인정받지만, 오대천은 물이 차고 깨끗해서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의 서식지로서 어류보호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총 1,700여 그루의 전나무숲 사이로 맑은 오대천이 흐르는 전나무 숲길은 찻길과 떨어져 있어 한결 더 여유롭고 오붓하다. 침엽수가 뿜어내는 피톤치드 향도 뿌리치기 힘든 매력 중 하나다. 산림욕과 더불어 중간중간 쉼터에서 명상 겸 ‘숲멍’을 즐기면서 몇 번씩 반복해서 숲길을 걷는 이들도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겨울 동화 속 순백의 세상,
명상과 치유의 숲길에 들다
한겨울 전나무숲은 순백의 세상이다. 맨발로 걷는 게 더 좋다는 폭신한 황톳길이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겨울 숲길 1번지’란 자랑이 무색하지 않다. 푸른 전나무잎에 하얗게 쌓였던 눈이 바람에 흩날리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면 추위까지 잊을 만큼 신비롭다. 눈 내린 숲의 고요와 적막, 순백의 세상이 발휘하는 치유의 힘을 새삼 알게 된다. 홀로 걷는 겨울 숲은 그 힘이 매우 강하다.
월정사 일주문의 ‘月精大伽藍(월정대가람)’ 현판은 탄허 스님(1913~1983)의 글씨인데, ‘月(월)’ 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어 운치가 한결 깊다. 서기 643년(선덕여왕 12) 창건한 월정사와 어언 1,380년간 함께 비바람을 맞아온 전나무 숲길을 걷다 보면 왠지 든든하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거침없이 솟구쳐 하늘로 뻗어 오른 전나무의 기백이 나의 어설픈 자존감에 생기를 주는 듯하다. 불쑥불쑥 밖으로만 달리던 마음이 어느새 안으로 향하면서, 오롯이 생각이 깊어진다.
숲길 초입, ‘해탈의 숲’을 지나서 만난 ‘삭발기념탑’에 눈길이 갔다. 월정사 단기출가학교 참가자들이 삭발식 때 자른 머리카락을 묻고, 그 자리에 세운 탑이다. 세속의 때를 벗고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그때의 다짐을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이 된다.
푸른 전나무와 흰눈만의 고즈넉한 세상을 걷는데 두런두런 사람들 목소리가 등장했다.
“여기쯤인가봐.” 하는 말에 “아냐, 저쪽인 것 같아.”라는 대꾸와 함께 한 가족이 일주문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중학생 또래의 아들 형제와 부부였다. 아차, 전나무 숲길이 ‘도깨비’와 ‘프로스트’ 등 인기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해져서 한겨울에도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 가족은 도깨비 촬영장소를 찾아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가 멀어져갔다.
길가에 낯설게 서 있는 성황각은 위치가 일주문과 천왕전 사이인 데다가 주위 환경에 비해 초라해 보여 아쉬웠다.
천 년 전의 아홉 그루 전나무가 이룬 숲
전나무숲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 전나무’는 2006년 태풍 피해로 쓰러진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시 나이가 600년이었다고 한다. 전나무는 몇 살까지 살며, 절 주변에 많이 사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이에 관해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본래 월정사 주변도 다른 절처럼 소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약 1천 년 전인 고려 말, 나옹 선사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있었는데, 소나무에 쌓였던 눈이 그만 발우 안으로 툭 떨어졌다. 그러자 산신령이 나타나 공양을 망친 소나무를 꾸짖고, 아홉 그루의 전나무에게 앞으로 월정사를 지키라고 명했다. 그 뒤 월정사 일대에는 전나무가 널리 숲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나무는 상처에서 젖 같은 액체가 나온다고 해서 ‘젖나무’로도 불린다. 습기 많고 땅이 깊은 계곡을 좋아하고, 다른 나무와 섞이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면서 큰 숲을 이룬다. 빨리 자라기 위해 직선으로만 뻗기 때문에 가지가 햇빛을 가려 다른 나무의 성장을 막기 때문이다. 미끈하게 위로 빨리 자라기 위해 스스로 가지를 떨어뜨리는 습성이 있다.
전나무는 빽빽이 모여서 자라므로 베기가 쉽고, 무르긴 하지만 키가 커서 건축물 기둥으로 적당하다. 또한 속살은 고급 종이의 재료로 매우 훌륭해서, 절을 지을 때 기둥으로 쓰거나 경전을 만들 때 희고 질긴 종이를 얻기 위해 절 주변에서 많이 가꾼다.
문수 성지 오대산과
달이 맑은 월정사
전나무 숲길 끝에 자리한 월정사는 신라 때인 643년, 자장 율사(590~658)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월정(月精)’이라는 이름에 ‘고요하고 맑은 달이 비추는 아름다운 세계’라는 뜻이 담긴 건 아닐까 싶을 만큼, 월정사는 화려하지도 누추하지 않고, 간결하면서도 담백한 느낌을 준다.
638년 당나라로 유학 간 자장 율사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몽중가피로 부처님 정골사리와 가사를 전해받았다. 643년 귀국해서 강원도 오대산 중대에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짓고 월정사를 창건한다. 이로써 오대산에는 월정사를 중심으로 동대 관음암, 서대 수정암, 남대 지장암, 북대 상두암, 중대 사자암 등, 다섯 봉우리에 각각 암자가 들어섬으로써 산 전체가 문수 성지, 불교 성지가 된다.
이후 통일신라 때 보천 태자와 효명 왕자(훗날 성덕왕)에 의해 문수 보살을 중심으로 하는 5만 보살신앙이 싹튼다. 고려 말에는 나옹 스님이 상주하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당이 주석하는 한편 조선 왕실의 외사고(外史庫)가 오대산에 들어오면서 사세가 번성한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1·4후퇴 과정에서 국군이 영산전 등 17동의 건물을 불태워 여러 문화재가 소실된다. 이에 1964년 탄허 스님이 크게 중건해서 절을 일으킨다. 이어 제자인 만화 스님이 적광전을 짓고, 근래 정념 스님이 일주문 밖에 성보박물관과 명상마을 등을 새롭게 조성함으로써 월정사 주변을 역사와 문화의 성지로 승화시켰다.
월정사의 유구한 역사는 수많은 성보를 조성하고 지켜냈다. 교구본사(제4교구)이긴 하나 단일 사찰로서 독자적으로 성보박물관을 갖춘 것도 그 때문이다. 네 기의 국보와 여섯 기의 보물 등 월정사의 수많은 국가지정문화재를 보관하고 있다.
주불전 적광전과 팔각구층석탑 앞
미소 짓는 석조보살좌상
월정사의 주불전인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아닌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국보인 적광전 자리는 《삼국유사》에서 유일하게 상서로운 곳으로 언급된 장소로서, 한국전쟁 때 불타기 전까지는 일곱 불보살을 모신 ‘칠불보전’이었다. 1964년 중건하면서 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화엄사상을 펼친 탄허 스님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석가모니불을 봉안했다.
적광전 앞마당의 팔각구층석탑은 월정사를 대표하는 성보물이며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신을 청동으로 장엄한 고려시대 최고의 석탑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 특히 바람이 불 때마다 72개의 풍경이 흔들리며 내는 청량한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부처님 법문인 듯 신비롭다. 현재 보수, 수리 중이다.
구층석탑 앞에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은 석조보살좌상은 미소가 매력적이다. 본래 청동 향로를 받쳐 들고 있었다고 하는데, 보물로 지정된 이 보살상의 이름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하지만 오래된 자료(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에 “탑 앞에 약왕보살의 석상이…….”라고 적혀 있어, 약왕보살임을 추측할 수 있다. 지금은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고, 탑 앞에는 복제한 보살상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가는 선재길
오대산 천년 숲!
걸으면서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
꽃보다 아름다운 초록에 눈을 씻고,
오대천 맑은 물소리를 귀에 담으며
힐링의 시간이 되는 나만의 공간.
월정사 홈페이지에서 따온 글이다. 문수 성지 오대산 5만 보살을 찾아 떠나는 길은 벗이 아무리 많아도 홀로 가야 하는, ‘한 가닥 오솔길’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시간은 외롭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꽃보다 아름다운 초록이 눈앞을 어지럽혀도, 오대천의 맑은 물소리가 귀를 울려도, 어차피 그 길은 무소의 뿔처럼 나 홀로 가야 한다.
크게 위안을 삼자면, 나를 찾아가는 천년의 숲길 끝에 천년의 고찰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량한 시간을 따라 부처님의 진리가 전해오고 있으니, 누구든 그 법에 눈 씻고 귀 열면 그 순간 ‘거기’에 다다라 있을 것이다.
1,400년 전 신라의 자장 율사를 비롯, 보천 태자와 성덕왕, 고려 말 나옹 선사와 그 제자 혼수 선사 및 함허 선사, 조선시대 한글 창제의 주역이었던 혜각 존자 신미 대사와 그 제자 학열 대사 등, 수많은 선지식과 수행자들이 천 년을 오간 길, 그 또 하나의 길이 오대산에 남아 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로 올라가는 선재길이다. 1960년대 말까지 스님들과 불자들이 두 발로 오갔던 9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산길이 요즘 둘레길과 등산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쉽지만 선재길에 관해서는 다음을 기약하면서, 불자들에게 미리 꼭 한 번 걸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조금 쓸쓸해 보이는 월정사 부도전을 만나거든, 입멸한 뒤에도 월정사의 안녕과 불법의 번영을 기원했던 그 스물세 명의 고승들께 감사와 찬탄의 삼배 올릴 것을 부탁드린다.
천 년의 승지라 보배로운 이곳
한 가닥 오솔길 그윽이 뚫렸어라.
살고 있는 스님은 세월을 가벼이 여기나
지나는 손은 머무는 시간 아까워라.
나는 새는 영험한 탑을 피해 가고
신령한 용은 옛 못에 잠겼도다.
오대산이 멀지 않음을 알겠나니
훗날 다시 와서 노닐 수 있으리.
-이행(李荇 1478~1534)의 〈월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