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이면 3.1운동이 일어난지 104년째 되는 날을 맞이한다. 조계사에도 3.1운동과 우리나라 근대 불교의 상징성을 담은 대웅전과 목조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1919년 3.1운동은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바꾼 거대한 정신이었다. 불교계에서도 박용성과 한용운 등의 불교계 승려들이 참여하였으며 젊은 승려들은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서 독립에 대한 신념과 정신을 실천하게 된다. 3.1운동 이후 불교계도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불교 개혁안들이 논의되었는데, 한국 불교계의 통일기관으로 총본산(總本山) 설치가 대표적이다. 총본산 건설 사업은 당시 불교계의 통합 기관 건립을 위한 최우선 과제였으며 30본산 주지가 주도하고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여된 대규모 공사였다. 그 중심은 일본식이 아닌 민족운동의 상징인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 십일전이라는 전통적인 목조건축을 옮겨 짓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1925년부터 1928년까지 건설된 십일전을 포함한 보천교 본소는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고 이를 일만 이천 원에 매입하여 이건한 건물이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이다.
총본산 법당(조계사 대웅전)은 1937년 10월 12일 상량식을 거행하였으며, 이후 1938년 6월 2일에는 편액을 설치하고 3일 후인 6월 5일 도갑사에서 이안한 불상을 전각에 봉안하였다. 불상 봉안과 함께 금용 일섭이 새로 조성한 후불탱을 8월 29일에 봉안하였으며, 마침내 10월 25일 낙성식과 봉불식을 거행함으로서 불사를 완료하였다. 이 불사는 민족혼을 일깨우면서 자존심을 회복하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1938년 도갑사에서 이운한 그 불상이 현재 대웅전 불단에 봉안되어 있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조선초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영암 도갑사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불상으로 1938년 조선불교 총본산 건립에 맞춰 현재의 조계사 대웅전으로 이운되었다. 이운 당시의 사진을 참고해보면 목조여래좌상은 불단 위에 별도의 대좌를 만들어 단독으로 봉안하였다. 불상의 좌우에는 용조각을 배치하고, 불단은 나전으로 꾸며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모두 파손되고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 후 2006년 현재의 주존인 삼존불좌상을 새로 봉안함에 따라 그 옆에 별도의 예배 공간을 마련하여 높은 감실안에 불상을 모셔 신앙하고 있다.
스님들의 말씀에 따르면 당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사에 어울리는 불상을 모시기 위해 전국의 불상을 검토하였으며 상호가 원만하고 당당하며 한국 불상을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도갑사 대웅전 불상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조계사로 이운된 이후 도갑사 대웅전과 내부에 봉안된 불상들은 1977년 화재로 모두 전소되었다. 다행하게도 이운됨으로서 유일하게 남은 이 목조여래좌상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고 조선불교의 자주성과 정통성을 품은 상징적 불상이 되었다. 조계사 대웅전 목조여래좌상은 1938년 본존불로 봉안된 이후 2000년 7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26호로 지정되었고 2022년 2월 보물로 승격되었다.
목조여래좌상이 있었던 원래의 사찰은 영암 도갑사이다. 도갑사는 세조(재위 1455-1468)와 그 동생 영응대군(永膺大君, 1424-1467년) 등 왕실의 후원 아래 15세기 중창불사가 크게 이루어졌다. 이 불사는 신미(信眉)와 수미(守眉)대사의 주도하에 1457년부터 1495년까지 약 38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유리건판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도갑사 대웅전의 불상들 역시 이때 만들어졌다. 따라서, 세조를 비롯한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만들어진 거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불상이라는 상징성을 가진다.
이 목조여래좌상은 높이 100cm, 무릎폭 78.2cm로 곧은 자세에 앞으로 숙인 머리, 가늘고 긴 신체에 낮은 무릎 그리고 작은 얼굴에 비해 넓은 어깨, 양감있는 가슴 처리 등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위엄있는 모습이다. 둥글고 높게 솟은 육계에 끝이 뾰족한 나발은 따로 만들어 하나하나 붙였는데 일정하고 규칙적으로 조각승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코는 콧볼이 좁고 콧대는 높아 날렵한 인상을 주며 도톰하고 작은 입술은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려 미묘한 미소를 표현하였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표현하고 귓불은 바깥으로 반전시켰으며, 세로 1.5cm 정도로 움푹 판 귓불과 사실적인 귓바퀴 는 정밀함이 돋보인다.
수인은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를 하였으며 왼손은 배 앞에서 손바닥을 위로하고 중지를 살짝 구부렸다. 유연하게 구부린 손가락과 살집이 있는 두툼한 손등, 손금까지 새긴 손바닥은 사실적이어서 인상적이다. 이 불상의 존명은 항마촉지인의 수인에서 석가불일 가능성도 있으나 살짝 구부린 손가락에서 아미타불일 가능성도 있어, 석가와 아미타불의 통섭적 의미를 보인다.
이 목조여래좌상의 왼쪽 어깨에 접혀진 삼각형의 옷주름이나 왼쪽 어깨에 자연스럽게 접혀진 삼각 옷자락 그리고 무릎과 종아리의 굴곡을 따라 형성된 사실적인 옷주름 등은 조선초기 15세기에 유행했던 특징들이다. 이는 불상의 목재 연륜연대인 1465±10 (2007년 조사)와도 거의 비슷하다. 목조여래좌상의 재료는 피나무 속, 잣나무류, 느티나무 등 총 3가지로 분석되었으며 몸체는 느티나무로 판별되었다. 느티나무는 단단하고 질긴 성질을 가진 불상 재질로는 보고된 바가 거의 없는 귀한 재료이다. 불상의 내부는 못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삼베와 옻칠로 마감한 상태인데 이는 매우 드문 사례이다. 옻칠 마감은 목부재를 잡아주어 갈라짐이나 비틀림을 방지하고 내구성을 높이는 효과와 더불어, 그 내부를 복장을 넣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바꿔준다.
사실 목조여래좌상의 내부는 복장물로 채워져 있었다. 복장물을 넣어 생명력을 부여하는 특징은 동아시아에서 오랫 동안 유행했던 전통이다. 현재 이 목조여래좌상의 15세기 제작 당시의 복장물은 없어진 상태이며, 근대 이후 몇 차례에 걸친 개금 및 재복장이 이루어지면서 다시 넣은 물목이 공개된 바 있다. 즉, 1938년 도갑사에서 이운하면서 새로 납입한 목제사리호와 사리2과, 비취, 호박 등의 보석류 등이 2006년 개금 불사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목제사리호에는 밑면에 붉은색으로 ‘일봉안 불기 이구육오년 칠월’(日奉安 佛紀 二九六五年 七月)이라 새겨져 있어 불기2965년인 1938년에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몸체에는 선교양종 조선불교 30본산 주지대표 이종욱스님, 총본산 건설위원 임석진, 사리 헌납은 대흥사 주지인 박영희스님이 주관하였다고 쓰여 있다(禪敎兩宗朝鮮佛敎 三十一本錫珍 舍利獻納者 禪敎兩宗大本山 大興寺 住持 朴暎凞).
조계사 대웅전에 봉안된 목조여래좌상은 사실적인 모습에 신비로운 매력이 돋보이는 조선시대 15세기의 아름다운 불상이다. 외형만이 아니라 내부까지 삼베와 옻칠로 마감한 우수성은 세조를 비롯한 왕실이라는 발원자의 높은 신분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1977년 화재로 인해 도갑사 불상군이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 조계사 목조여래좌상은 15세기 중후반 왕실 발원 불사의 수준과 품격을 보여주는 현존 유일한 도갑사 대웅전 존상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민족운동의 상징인 정읍에 있었던 보천교 십일전을 옮겨온 조계사 대웅전은 그 내부에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조선시대 최고의 불상을 봉안함으로서 비로소 완전성을 획득하게 된다. 지금, 목조여래좌상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린 항마촉지의 우아한 손동작과 신비로운 표정으로 대웅전을 고요하고 이상적인 기도의 공간으로 가득 채운다.
조계사 대웅전과 목조여래좌상, 그 존재만으로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