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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정은우의 우리 곁에 오신 부처님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 입력 2023.02.27

예술과 기술로 불교조각의 역사를 바꾸다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석굴암 석조여래좌상

 우리나라에서는 가끔 불교조각의 역사를 바꾸는 대형작품이 등장하여 연구자들을 긴장시킨다. 경상북도 봉화 청량사 유리보전에 본존불로 봉안된 건칠약사여래좌상이 이에 해당한다. 이 불상은 재료적 특수성과 석굴암 본존불상을 닮은 특징 때문에 보물 지정까지 7년이라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 연구자에 따라 건칠이라는 기법의 등장 시기와 석굴암 석조여래좌상과 비슷한 양식, 보수 부분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는 불교미술 전공자들이 간혹 맞닥뜨리는 낯설지 않은 문제들이다. 같은 부분을 보면서 
서로 다른 해석을 하게 될 때 이를 해결해주는 것이상에 대한 정밀한 조사와 과학적인 분석이다. 

청량사 건칠역사여래좌상은 높이 90cm, 무릎 폭 72.5cm의 크기에 항마촉지의 수인과 넓은 어깨, 건장한 불신이 특징이다. 얼굴은 비교적 큰 편이지만 이마는 좁은 편이며 위로 치켜 올려진 기다란 눈, 뚜렷한 코와 입이 중앙으로 몰려 강한 인상과 분위기를 보인다. 도드라진 광대뼈와 탄력적인 턱, 입술의 가장자리를 눌러 만든 희미한 미소도 특징이다. 머리의 작고 촘촘한 나발은 불상의 재료인 건칠과는 다른 재료로 판명되는데 엑스레이 촬영 결과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독특하다. 

어깨와 결가부좌한 무릎 폭이 넓으며 불록 솟은 가슴, 잘룩한 허리, 편단우견의 대의, 두 무릎 사이로 흘러 내린 부채꼴의 옷자락, 간결한 옷주름 등은 항마촉지의 수인과 더불어 통일신라 이후 유행한 석굴암 본존불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이는 얇게 밀착된 대의와 입체적인 옷주름, 다리 위로 걷어 올려진 밀착된 옷자락 등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얼굴의 표현이라든가 넓은 어깨에 비해 짧은 허리, 넓은 무릎 너비 등 비례 면에서는 다소 다른 점도 찾을 수 있다. 수인은 오른손은 무릎 밑으로 내려 항마촉지인을 하였으며 왼손은 복부 위에서 선정인을 하였는데 현재 동그란 구슬이 놓여 있어 약사불로 이해하고 있다. 

이 건칠약사여래좌상은 3D와 CT, 미국 베타연구소에 의뢰한 방사성탄소연대측정 등의 과학적인 조사와 분석이 매우 심도있게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고려후기부터 유행하는 기존의 건칠상과는 다른 놀라운 제작기술이 확인되었다. 엑스레이 촬영 결과 눈에는 투명하고 큰 수정으로 눈동자를 감입하고, 내부에는 나무로 보강을 하여 원형을 유지하였다. 특히, 귀와 손은 삼베로 조성하였는데 손의 경우 구조적으로 취약한 부분을 보강하기 위해 포를 잘라내고 내부에 목재를 보강하여 고정하였다. 또한 상의 측면을 잘라 바느질로 꿰매고 흑색 접착제로 고정하였는데 이는 매우 특수한 기술로서 중국이나 일본에도 그 사례가 없는 유일한 작품이다. 불상 앞면과 뒷면을 접합하기 위해 사용된 실은 육계와 얼굴의 측면 중앙에서 관찰된다. 상의 두께는 7~8겹의 삼베를 이용하여 만들었다. 삼베 눈메움의 재료에서 골회의 사용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초기 중국의 건칠불 사례와 동일하며, 우리나라 건칠불에서 발견된 가장 이른 사례이다.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은 목 상단부에서 채취한 직물로 분석하였는데 분석결과 AD 685년~885년, 불상 밑면에서는 770~905년(AD 920~965년)이라는 결과가 도출되었다. 이 시기는 통일신라 후기부터 고려초기에 해당된다. 그런데, 건칠약사여래좌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석굴암 본존불과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한 점이다. 재료와 크기의 차이를 제외하면 불상의 비율은 물론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거의 비슷하다.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과 과학적인 분석 결과에 의한 제작시기 추정이 서로 비슷한 점은 매우 놀랍다. 

건칠약사여래좌상의 불상 내부에서 복장물도 발견되었다. 다양한 전적과 다라니를 비롯하여 상에 대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천인동발원문(千人同發願文)」과 「결원문(結願文)」등 중수기가 포함되어 있다. 천인동발원문은 1560년(명종 15) 순묵(淳黙)이 중심이 되어 개금 중수하였음과 지원(至元)5년에 개금 한 내용 그리고 가정(嘉靖) 39년(1560년) 불상의 중수시 참여한 사부대중의 목록과 개금에 참여한 화원의 이름이 적혀있다. 지원은 중국 원(元)대의 연호로서 2번 사용되었는데 5년은 1268년과 1339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불상은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1339년 이전에 조성되었음이 확인된다.

건칠약사여래좌상이 보물로 지정된 이후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다양한 조사와 개금불사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사불이 앉아 있던 원래의 목조대좌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 밑면 다리는 소나무, 문양은 피나무, 내부는 잣나무 등 세 종류의 나무로 제작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새로운 내부 묵서도 발견되었는데 이미 많이 지워지고 흐릿해서 전체 판독은 어렵다. 다만 대좌 상대 내부의 ‘임술년(壬戌年)’과, 내면에 ‘강희54년(康熙五十四年)’ 이라는 묵서는 선명하다. 강희54년은 불상의 중수기에 나오는 1715년과 동일하다. 따라서, 불상과 함께 1715년에 중수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으며 불상을 중수할 때 새롭게 제작한 불상의 원래 대좌였음도 확실해졌다. 즉, 불상이 조성된 당시보다는 불상을 중수할 때 새롭게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는데, 중요한 묵서는 이 대좌를 만든 시기로 판단되는 ‘임술년’이다. 이 목조대좌는 비슷한 시기의 다른 목조대좌와 비교하면 고려후기~조선전기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을 감안하면 임술년은 1322년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고려시대의 목조대좌는 현존 사례가 매우 드물어 매우 귀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봉화 청량산 청량사

청량사 유리보전


유리보전에 모셔진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의 원래 사찰명은 연대사(蓮臺寺)이다. 이 명칭은 약사여래좌상에서 나온 발원문과 더불어 조선시대 문집의 기록을 통해 확인되며 구체적인 사찰의 운영과 내력도 밝혀졌다. 연대사는 1725년경 이후부터 내청량사 또는 현재의 사찰명인 청량사로 불렸음이 확인되었다. 청량산은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여 통일신라시대부터 최치원, 김생 등과 관련한 전승들과 유적들이 현재도 남아 있다. 현재 청량사에 남아 있는 <유리보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이다. 조선시대에는 청량산을 다녀간 많은 문인들의 <청량산기>가 남아 있다. 16세기 
주세붕(周世鵬,1495~1554)의 「유청량산록(遊淸凉山錄)」부터 1570년의 권호문(1532~1587)의 「유청량산록」,1594년 신지제(1562~1624)의 「유청량산록」, 1601년 김중청(1567~1629)의 「유청량산기」, 1701년 이익(1681~1763)의「유청량산기」 등이 대표적이다.

이 기록들을 종합하면 자소봉 혹은 선학봉 아래에 있는 연대사가 산중의 최고 명당이며, 청량산에 있는 사찰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고 거주하는 승려의 수도 많았다고 하였다. 1673년 안동부사를 지낼때 연대사를 방문한 신후재(申厚載)는 여행기 「유청량산기」에 (『규정집(葵亭集)』권7) 연대사와 전각인 유리보전에 대해 다음
과 같이 설명하였다. 

“절문에 이르니 날이 이미 어두워졌다. 승려 계정이 나를 인도하여 지장암에 들어갔다. 암자는 절벽에 걸려 있었는데 정갈하면서도 매우 빼어난 모습이었다. 그 서쪽은 유리보전으로 양 옆의 처마 아래는 선승방이다. 또 그 서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향로전이 나온다. 그 남쪽은 청풍루이니 이들을 다 합쳐 연대사라 한다.”(到寺門 日已曛黃. 山人戒凈者引余入地藏菴. 菴置懸崖 南爲淸風樓 摠以名之曰蓮臺寺)

건칠약사여래좌상의 얼굴부분


실로 꿰맨 앞판과 뒷판의 접합모습

조선전기 이후 연대사 즉 청량사는 많은 부침을 거듭하게 된다. 1894년경 청량산을 찾은 유흠목(柳欽睦)은 “연대사는 자소봉과 탁필봉의 아래에 있어 온 산의 중앙에 해당되며 이곳 역시 승려가 없고 다만 길손만이 와 있었다.”라고 하여 폐사 직전임을 암시하고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져 오다가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된 것은 청량사 회주 지현스님에 의해 불과 몇 십년전 이루어졌다. 

불교조각사를 다시 쓰게 한 건칠불의 시원적 작품인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에 대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건칠불은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을 시작으로 고려초기로 추정되는 국보 희랑대사상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에서는 20여 구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은 매우 귀한 재질의 불상이다. 이 건칠불상들은 대체로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에 집중되어 있다. 

산세가 수려했던 청량사는 일찍부터 수도자들과 문인들이 학문을 닦는 곳이었다. 최치원과 김생이 그러했고, 퇴계 이황이 이곳에서 학문을 익혔다. 4계절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명승’으로 지정된 청량산, 역사를 품은 청량사. 석굴암 본존불을 닮은 비밀을 간직한 건칠약사여래좌상, 아름다운 봄날에 꼭 찾고 싶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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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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