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곳,
신라 고찰 봉곡사
소나무 숲길은 봉곡사 앞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로 올라가면 ‘천년비손길’을 잇는 봉수산 등산로이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송남휴게소 방향인데 봉곡사 솔바람길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작은 정자가 있는 그 길 입구 쉼터에는 유곡리 사방댐 안내 표지석이 서 있다.
삼거리 가운데 길이 봉곡사로 가는 길이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으니, 오른쪽 길 옆의 공덕비를 보고 봉곡사 경내임을 짐작한다. 오르막이 끝나는 곳에서
산쪽으로 만공탑이 올려다보인다. 그 오른쪽으로 작은 봉우리 아래 한눈에 다 담아질 만큼 단촐한 고찰 봉곡사가 눈에 들어온다.
만공탑은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존경받는 만공 스님(滿空 月面, 1871~1946)이 이곳 봉곡사에서 깨달음을 이룬 것을 기리는 탑이다. ‘世界一花(세계일화)’라는 글이 새겨진 크고 둥근 돌을 세 명의 동자가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1993년 당시 주지 묘각 스님이 세웠다.‘세계일화’는 만공 스님의 친필이다.
1895년 7월 25일 새벽, 범종을 치며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를 외우던 만공 스님이‘법계성(法界性)’의 이치를 확연히 깨닫고 나니, 화장찰해가 홀연히 열렸다. 그 깨달음을 게송으로 읊었다.
진리는 본래 시간을 초월한 것
흰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가는데
달마는 무엇하러 동토에 왔던가.
닭은 새벽에 울고 해는 아침에 뜨네.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磨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사천왕문 같은 작은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봉곡사 마당이다. 대웅전과 나란히, 향각전으로 알려진 건물이 푸른 대숲과 소나무 병풍을 두른 채 서 있다. 봉곡사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아담한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다. 아래쪽의 고방 건물과 함께 충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지난 2021년 현재 주지 혜전 스님이 해체 복원한 대웅전은 낡고 삭은 부분을 떼어내고 새 목재를 덧댐으로써 오래된 목재와 새 목재가 섞여 있다. 헌데 그 모습에서 묘하게 생기와 세월감이 함께 느껴져 어색하지 않다.
대웅전 주불인 석가모니불(목조)은 몸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고 상체가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 특이한 형태의 불상이다. 충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는데, 조선
후기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웅전과 무설전(無說殿)의 주련 글씨는 탄허 스님(1913~1983)의 필체로 알려져 있다.
봉곡사는 887년 도선 국사가 ‘모연고찰(貌然古刹)’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 국사가 산 너머에서 절터를 닦고 있었는데, 까마귀들이 계속 밥을 물고 가기에 뒤따라갔다가 까마귀가 사라진 곳에 절을 짓고 ‘석암(石庵)’이라고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1150년 고려 의종 4년 보조 국사가 다시 건립해서 ‘석암사’로 불렀다가, 1584년 조선 선조 17년 화암 거사가 중수하고 봉서암(鳳棲庵)으로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 때 본전과 여섯 암자가 모두 불타서 1647년 인조 24년에 중창했고, 1794년 정조 18년 중창하면서 봉곡사로 이름을 바꿨다. 1825년 순조 25년 봄, 요사채를 중수하고 2층 누각을 신축했으며, 1872년 고종 9년 서봉 화상이 법당 및 요사 뒤편 십여 칸을 중축했고 1931년 중수를 거쳐, 2021년 대웅전을 해체 복원했다. 대웅전 지장시왕도(1867년 조성)가 지난 2021년 충남 문화재자료로 새로 지정받았다.
만공 스님과 다산 정약용의 자취
봉곡사에는 만공 스님의 ‘세계일화’와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의 자취가 어려 있다. 100년이란 시간 차이를 두고 만공 스님과 다산 정약용이 이곳에 머물렀던 기록이 남아 있다. 만공 스님은 1895년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었고, 다산 정약용의 실학 강론은 1795년에 있었던 일이다.
다산 정약용이 묵었던 장소는 고방(창고)과 연결된, ‘ㅁ’자형 요사채로 추측할 수 있다. 1795년 가을, 금정도(홍주) 찰방으로 좌천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이곳에서 열흘 동안 묵었다는 기록을 스스로 남겼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손자 목재 이삼환 등 열세 명의 실학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이익의 《가례질서》를 강론하고, 유고를 정리했다고 한다.
다산은 《서암강학기》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 친구와 함께 시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서 세수하고 양치질을 했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소요하면서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연기와 구름이 섞여서 산기(山氣)가 더욱 아름다웠다.”
봉곡사 고방은 요사와 덧붙은 정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2층 창고다.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고 2층의 벽은 나무를 덧댄 판벽이다. 지금도 사중의 잡동사니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다. 2층 다락은 여닫이문을 열어 놓으면 한여름에도 산바람이 시원하다. 만공 스님과 다산, 이 두 사람이 현실에서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상상해보는 건 한여름밤의 꿈처럼 덧없지만 한편 흥미롭기도 하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려오는 길에 다시 보았다. 소나무 숲길 소나무들의 밑동에 새겨진 ‘V 자형’ 상처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전쟁용 비행기 연료로 쓰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면서 만든 상처였다. 웃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 더 가슴 아프다고들 한다. 80년이란 시간도 그 상처를 감춰주지는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어찌 그때만의 상처일까. 여전히 우리는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소나무 숲길의 소나무들은 그 상처를 품고도 여전히 기품있고 아름다웠다. 찾아오는 이들을 솔바람이 안아주고 솔향기가 위로해준다. 아픔마저 승화시킨 자연의 위대함에 가슴이 뻐근하다. 자신들의 몸을 내어주고 얻은 치열하고 순연한 깨달음. 그들에게 이제 우리 인간들이 대답할 차례다. 앞으로는 우리가 그대들을 잘 지키겠노라고. 봄꽃 피는 그 길에 다시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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