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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천년숲 사찰기행

소박한 일상의 휴식, 솔향기 속을 거닐다

  • 입력 2023.02.27

햇살과 바람, 사찰이 일군 숲, 아산 봉곡사 ‘소나무 숲길’ 

 


소나무 숲길 소나무들의 밑동에 새겨진 ‘V 자형’ 상처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전쟁용 비행기 연료로 쓰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면서 만든 상처이다.

이번 기행은 여느 때와 달랐다. 출발부터 여유로웠다. 서울 도심의 출근 지옥에 발목 잡히지 않으려고 새벽부터 헐떡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숲길 기행이라고? 좋겠다~”라며, 주변에서는 마치 휴가라도 다니는 것처럼 취급하고 부러워하기 일쑤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천 년의 숲’들은 그 시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리, 대부분 우리 일상에서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어진 시간은 넉넉지 않으니, 매번 새벽부터 종종거려야 한다. 장시간의 운전과 산길 발품에서 오는 몸의 고단함은 보너스다. 

굽은 소나무 숲의 수려한 풍광
여유롭게 아침을 챙겨 먹고 충남 아산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아산시 송악면 도송로 632길 138(유곡리 595) 봉곡사(鳳谷寺) 소나무 숲길.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일상에서 잠깐 짬을 내어 찾아가기에 적당한 곳이다. 

봉곡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본사 마곡사 말사로서, 봉황의 머리를 닮은 봉수산(鳳首山) 기슭에 터를 잡은 건 서기 887년이다. 신라 진성여왕 원년에 도선 국사가 창건한 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창을 거쳐 무려 천백여 년간 그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봉곡사에는 이렇다 할만한 문화재도 없고, 절의 규모 또한 단촐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 않다. 이런 봉곡사가 ‘소나무 숲길’ 덕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산시 ‘천년의 숲길’ 가운데 하나인 봉곡사 소나무 숲길은 봉수산 초입, 봉곡사 주차장에서부터 절 앞까지 이어지는 700미터가량의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황토를 덮은 그 숲길 양쪽에 멋지게 굽은 소나무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기품 있게 서 있다. 

키 큰 겨울나무들이 눈을 이고 서 있는 왼쪽 산언덕의 풍경은 김정희의 ‘세한도’를 연상케 한다. 오른쪽 작은 계곡 건너편에도 소나무 숲이 울창한데, 잠시 걸음을 멈추고 서면 그 솔숲을 흔들고 불어오는 솔바람에 코끝이 맵싸해진다.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지루하지 않은 길, 아쉬움으로 올라온 길을 뒤돌아본다. 새로운 감동이 밀려오고, 감탄이 탄식처럼 저절로 흘러나온다. 

“아, 전에 본 그 소나무 숲은 소나무 숲이 아니었나봐!” 

솔숲 사이의 돌탑들이 흰눈에 씻긴 듯 말갛다. 몇 년 전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운 거리 숲’ 부문에서 장려상을 탄 이 소나무 숲길은 한 백과사전에 ‘천년의 숲길’로 이름이 올랐다. 거기 실린 사진을 보고 찾아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생명력과 장수의 상징, 소나무

우리 민족의 소나무 사랑은 유별나다. 소나무로 지은 집 안방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새끼줄에 솔가지와 숯을 끼워 금줄을 쳐서 생명의 탄생을 알렸다. 그 아이는 뒷동산 솔숲에서 미끄럼을 타며 자랐다.

일상에서는 가을이면 금빛 솔가루를 갈퀴로 긁어다가 겨우내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명절에는 송홧가루로 다식을 만들어 먹었다. 양반집에는 십장생 그림의 병풍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었고, 죽으면 소나무 관에 누워 땅에 묻혔다. 

조선 왕조의 소나무 사랑은 극진했다. 조선 왕릉과 태실 주변에는 반드시 소나무를 길렀다. 소나무가 생기와 번영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집 짓고 배를 만들거나 왕의 관을 짤 때도 소나무가 재료였다. 1411년 한양 남산에 장정 3천 명을 동원해서 20일간 소나무를 심은 기록이 있는데, 그 소나무가 애국가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의 조상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나무는 구황식물이었다. 식량이 없어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한다’는 말에서, 이 ‘목피’가 소나무껍질(송기)이다. 굶주린 백성들이 소나무껍질로 해먹은 떡이 바로 송깃떡이다. 소나무는 강인한 생명력과 장수, 절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식물로 수많은 시조와 그림, 문학작품의 소재로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예부터 사찰 주변에 우거진 솔숲이 많았다. 조선시대 문학작품들을 보면 송광사, 쌍계사, 해인사 등의 사찰 주변에 솔숲이 우거졌음을 알 수 있다. 법흥사, 법주사, 불영사, 표충사의 들머리에도 소나무가 울창했는데, 소나무 숲은 선종의 관점에서 사찰 수행환경의 완성이며 불교 전파의 매개체였던 것 같다. 

만공탑에서 보이는 봉곡사 전경


세계일화 만공탑


대웅전 주불 석가모니불


봉곡사 고방


봉곡사 대웅전과 무설전

만공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곳,
신라 고찰 봉곡사
소나무 숲길은 봉곡사 앞에서 세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로 올라가면 ‘천년비손길’을 잇는 봉수산 등산로이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송남휴게소 방향인데 봉곡사 솔바람길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작은 정자가 있는 그 길 입구 쉼터에는 유곡리 사방댐 안내 표지석이 서 있다. 

삼거리 가운데 길이 봉곡사로 가는 길이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으니, 오른쪽 길 옆의 공덕비를 보고 봉곡사 경내임을 짐작한다. 오르막이 끝나는 곳에서 
산쪽으로 만공탑이 올려다보인다. 그 오른쪽으로 작은 봉우리 아래 한눈에 다 담아질 만큼 단촐한 고찰 봉곡사가 눈에 들어온다. 

만공탑은 근대 한국불교의 중흥조로 존경받는 만공 스님(滿空 月面, 1871~1946)이 이곳 봉곡사에서 깨달음을 이룬 것을 기리는 탑이다. ‘世界一花(세계일화)’라는 글이 새겨진 크고 둥근 돌을 세 명의 동자가 떠받들고 있는 형태로, 1993년 당시 주지 묘각 스님이 세웠다.‘세계일화’는 만공 스님의 친필이다.

1895년 7월 25일 새벽, 범종을 치며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를 외우던 만공 스님이‘법계성(法界性)’의 이치를 확연히 깨닫고 나니, 화장찰해가 홀연히 열렸다. 그 깨달음을 게송으로 읊었다. 

진리는 본래 시간을 초월한 것 
흰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가는데
달마는 무엇하러 동토에 왔던가. 
닭은 새벽에 울고 해는 아침에 뜨네.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磨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

사천왕문 같은 작은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봉곡사 마당이다. 대웅전과 나란히, 향각전으로 알려진 건물이 푸른 대숲과 소나무 병풍을 두른 채 서 있다. 봉곡사 대웅전은 정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아담한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다. 아래쪽의 고방 건물과 함께 충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지난 2021년 현재 주지 혜전 스님이 해체 복원한 대웅전은 낡고 삭은 부분을 떼어내고 새 목재를 덧댐으로써 오래된 목재와 새 목재가 섞여 있다. 헌데 그 모습에서 묘하게 생기와 세월감이 함께 느껴져 어색하지 않다. 

대웅전 주불인 석가모니불(목조)은 몸에 비해 머리 부분이 크고 상체가 약간 앞으로 기울어진 특이한 형태의 불상이다. 충남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는데, 조선 
후기 1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대웅전과 무설전(無說殿)의 주련 글씨는 탄허 스님(1913~1983)의 필체로 알려져 있다. 

봉곡사는 887년 도선 국사가 ‘모연고찰(貌然古刹)’이란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한다. 도선 국사가 산 너머에서 절터를 닦고 있었는데, 까마귀들이 계속 밥을 물고 가기에 뒤따라갔다가 까마귀가 사라진 곳에 절을 짓고 ‘석암(石庵)’이라고 불렀다는 전설도 있다.

1150년 고려 의종 4년 보조 국사가 다시 건립해서 ‘석암사’로 불렀다가, 1584년 조선 선조 17년 화암 거사가 중수하고 봉서암(鳳棲庵)으로 고쳐 불렀다. 임진왜란 때 본전과 여섯 암자가 모두 불타서 1647년 인조 24년에 중창했고, 1794년 정조 18년 중창하면서 봉곡사로 이름을 바꿨다. 1825년 순조 25년 봄, 요사채를 중수하고 2층 누각을 신축했으며, 1872년 고종 9년 서봉 화상이 법당 및 요사 뒤편 십여 칸을 중축했고 1931년 중수를 거쳐, 2021년 대웅전을 해체 복원했다. 대웅전 지장시왕도(1867년 조성)가 지난 2021년 충남 문화재자료로 새로 지정받았다. 

만공 스님과 다산 정약용의 자취
봉곡사에는 만공 스님의 ‘세계일화’와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의 자취가 어려 있다. 100년이란 시간 차이를 두고 만공 스님과 다산 정약용이 이곳에 머물렀던 기록이 남아 있다. 만공 스님은 1895년 이곳에서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었고, 다산 정약용의 실학 강론은 1795년에 있었던 일이다. 

다산 정약용이 묵었던 장소는 고방(창고)과 연결된, ‘ㅁ’자형 요사채로 추측할 수 있다. 1795년 가을, 금정도(홍주) 찰방으로 좌천된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이곳에서 열흘 동안 묵었다는 기록을 스스로 남겼다.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의 손자 목재 이삼환 등 열세 명의 실학자들과 함께 머물면서 이익의 《가례질서》를 강론하고, 유고를 정리했다고 한다.
 
다산은 《서암강학기》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여러 친구와 함께 시냇가에 나가 얼음을 깨고 샘물을 떠서 세수하고 양치질을 했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함께 산언덕에 올라가 소요하면서 풍경을 바라보았는데 연기와 구름이 섞여서 산기(山氣)가 더욱 아름다웠다.” 

봉곡사 고방은 요사와 덧붙은 정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2층 창고다. 바닥이 마루로 되어 있고 2층의 벽은 나무를 덧댄 판벽이다. 지금도 사중의 잡동사니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다. 2층 다락은 여닫이문을 열어 놓으면 한여름에도 산바람이 시원하다. 만공 스님과 다산, 이 두 사람이 현실에서 만났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상상해보는 건 한여름밤의 꿈처럼 덧없지만 한편 흥미롭기도 하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내려오는 길에 다시 보았다. 소나무 숲길 소나무들의 밑동에 새겨진 ‘V 자형’ 상처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전쟁용 비행기 연료로 쓰기 위해 송진을 채취하면서 만든 상처였다. 웃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 더 가슴 아프다고들 한다. 80년이란 시간도 그 상처를 감춰주지는 못했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어찌 그때만의 상처일까. 여전히 우리는 자연을 훼손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있지 않은가.

소나무 숲길의 소나무들은 그 상처를 품고도 여전히 기품있고 아름다웠다. 찾아오는 이들을 솔바람이 안아주고 솔향기가 위로해준다. 아픔마저 승화시킨 자연의 위대함에 가슴이 뻐근하다. 자신들의 몸을 내어주고 얻은 치열하고 순연한 깨달음. 그들에게 이제 우리 인간들이 대답할 차례다. 앞으로는 우리가 그대들을 잘 지키겠노라고. 봄꽃 피는 그 길에 다시 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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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순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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