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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정운스님의 경전이야기

아함부 경전

  • 입력 2023.02.27

<아함부 경전>은 어떤 경전인가?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시에는 부처님 말씀이 곧 경이고, 율이었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고, 교법을 경장(經藏)으로 정리하고 수행자들의 수행 규칙과 승가의 규범을 율장(律藏)으로 정리하였다. 곧 아함과 니까야는 매우 일찍 결집된 경장이다. 아함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여 있으며, 북방불교[대승불교: 한국·중국·일본·티벳·베트남]에 속하는 경전으로, 아가마(Agama)라고 한다. 곧 ‘구전되어온 법장(法藏)·전교(傳敎)’라는 의미이다. 이 아함을 남방불교[상좌부불교: 태국·미얀마·캄보디아·스리랑카 등]에서는 ‘니까야[Nikaya]’라고 하는데, 빨리어로 쓰여 있다. 즉 아함부 경전은 대승불교에 속하는 경전이고, 니까야는 상좌부불교의 소의경전이다.

 

아함부 경전에는 전반적으로 수행 원리와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이다. 연기설·3법인[苦, 無我, 無常]·중도·3독·3학·4성제·5온·12연기·12처·18계·8정도·4념처·37조도품·4과·업과 윤회·보시와 인욕·부처님과 제자들의 수행 대담·당시 사상가들 이야기·제자들 수행이야기·마구니를 등장시켜 대담을 통해 불교 수행방법을 부각시키는 내용 등이다.

 

<아함부 경전>은 어떻게 분류되는가

 

본 원고는 대승불교 아함부를 언급한다. 아함부 경전이 대략 4세기 무렵, 중국에 전해져 4세기 말엽부터 5세기 초반에 한역이 이루어졌다. 아함은 크게 네 부류로 나뉜다.

 

잡아함 아함부 가운데, 제일 먼저 결집되었다. 아함부 경전가운데 대표 경전군으로 선(禪)과 관련된 내용이 많은 편이며, 짧고 간결하며 교훈적인 내용들이다. 

중아함 내용의 길이가 비교적 중간쯤 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아함 길이가 비교적 긴 경으로 대표 경전으로는 『대반열반경』과 『육방예경』 등이다. 

증일아함 법수(法數)의 순서대로 나열했는데, 1법∼10법까지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어 점차 증가하는 측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함부 경전>의 내용

예전에는 우리나라를 포함해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아함부 경전을 ‘소승’이라는 명칭으로 도외시했었다. 근자, 우리나라에 초기불교 연구자가 늘고 있으며, 위빠사나 수행자가 늘어나면서 초기불교 연구가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아함부에서 다루는 진리는 대승불교의 근간이요, 전불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다음에 언급하는 아함부 경전 내용은 중생의 삶과 밀접한 내용만을 엄선하였다.

 

 

 

삶의 현실 그대로를 직시하라.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이다. 어느 과부가 오로지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 어느 날부터 아들이 시름시름 앓더니, 삶을 마감했다. 과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걸음에 기원정사로 달려왔다. 부처님을 뵙자마자 여인이 말했다. 

“부처님, 제 아들이 죽었습니다. 제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들을 살리고자 한다면, 내가 말한 대로 하여라. 저기 사위성 마을로 들어가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가정에서 불씨를 구해온다면, 네 아들을 살려 주겠다.”

여인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불씨를 구하고자 온 마을을 쏘다녔으나 아무리 다녀도 불씨를 구할 수가 없었다. 어느 집이든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인은 부처님께 되돌아와,‘불씨를 구하지 못했다’고 말하자, 부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살면서 네 가지를 면할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는 것이오, 아무리 부귀하더라도 반드시 빈천해지는 것이며, 어떠한 것이든 모이면 흩어지기 마련이고, 건강한 육신을 가진 사람도 때가 되면 반드시 죽게 마련이다.” 

이 여인은 부처님께서 자신에게 ‘불씨를 왜 구해오라’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계기로 출가하여 비구니[끼사고타미]가 되었고, 무상관으로 수행해 아라한이 되었다. 인간은 태어나면 아프고, 늙어가며 죽을 수밖에 없다[→生老病死]. 또한 이 세상 어떤 물건이든 머물다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成住壞空]. 당연한 실상(實相)의 진리이다. 이는 3법인 가운데 하나인 영원한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 법문이다. 

 

 

 

자기 자신과 진리[法]를 등불로 삼아라.

비구 중에 박카리라는 승려가 있었다. 박카리는 더 이상 치료될 수 없는 중병에 걸려 있었다. 그는 육체적 병고 때문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생각까지 할 만큼 힘들어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견하고 부처님을 꼭 한번 뵙기를 고대했다. 부처님께서 이를 아시고 박카리의 처소로 찾아오셨다. 박카리는 힘든 몸을 일으키며 부처님께 예를 갖추려고 하자, 부처님께서 박카리에게 말씀하셨다. 

“박카리야, 나의 이 늙은 몸을 보고 예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진리[法]를 보는 자는 곧 부처를 보고, 부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느니라.” 

여기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부처를 보고…’의 부처라는 존재는 2500년 전 인도 카필라성의 성자 석가모니 부처님을 지칭하지 않는다. 영원한 진리인 법신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교조주의적인 사고방식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당신을 신격화하는 것조차 금하셨다. 그래서 ‘자귀의(自歸依) 법귀의(法歸依)’라고 하는 것이다. 

 

 

 

삶의 고뇌와 고통을 여의는 길 → 사성제 이야기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이다. 만동자 비구가 부처님 계신 곳으로 와서 이런 질문을 하였다. 

“부처님, 세계는 영원한 것입니까, 아니면 무상한 것입니까?, 영혼과 육체는 동일합니까? 별개의 것입니까?, 사후에도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지, 존재할 수 없는지에 대해 대답해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정확한 답변을 하지 않는다면, 저는 이 교단을 떠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동자야! 만약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아 고통을 받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옆에 있던 친구들이 의사를 부르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직 화살을 뽑아서는 안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이름이 무엇이고,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어떤 나무로 만들어졌는지 알아야겠고, 또 화살에 어떤 독이 묻어 있는지를 알아야겠소.… 이 모든 것들을 알고 난 뒤에 이 독화살을 뽑겠소.’라고 한다면 그는 그것들을 다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퍼져 죽고 말 것이다. 만동자야! 세계가 영원한지?, 무상한지? 육체와 영혼이 하나인지, 개별인지? 사후에도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고 해서 삶에서 겪는 우리들의 고통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고를 여의고 열반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경전에 ‘고를 여의고 열반을 얻는 것’이란 이고득락(離苦得樂)이다. 중생들의 삶은 고통으로 연속되어 있는데, 형이상학적인 철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 삶에서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이는 4성제를 말하는데, 불교라는 종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상이다. 인간은 집착 때문에 모든 고통과 고뇌가 발생한다[집성제와 고성제]. 이것을 알았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 열심히 정진해서 해탈열반을 얻어야 한다[멸성제와 도성제]. 이렇게 불교는 자신의 고를 직접 해결해야 하므로 ‘수행의 종교’, ‘신행의 종교’라고 한다. 

 

 

 

과거·미래가 아닌 현재 시점에 머물러라.

… 그리고 그 ‘현재’도 집착하지 말라. 

“지나간 일에 근심하거나 걱정하지 않고, 앞으로 생기지도 않은 일에 마음 쓰지 않으며 현재에 자각하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사띠[sati, 念]를 유지하라. 먹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밝고 환한 얼굴을 갖게 될 것이다. 다가올 미래 일에 마음을 치달리거나 지나간 일을 돌아보고 근심하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음의 불로 스스로를 태우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오로지 현재 일어난 것들을 관찰하라.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말고, 그것을 추구하고 실천하라. 오직, 오늘 마땅히 할 바를 열심히 하라. 어느 누가 내일 죽음이 없다고 장담하겠는가. … 능히 이렇게 추구하는 자는 마음을 다해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실천하라.” 

 

중국의 임제 선사(?∼866)는 “바로 지금, 여기일 뿐 다른 시절은 없다[卽是現今 更無時節]”고 하였다. 또 성엄스님께서도 이렇게 말했다. “수행의 결과에는 신경 쓰지 말라. 그 역시 가고 오고 변할 것이다. 그저 현재의 순간에 마음 두는 최선의, 가장 안전한 수행 방식이다.” 현재에 올인(All-in)하는 것은 수행에서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삶에서도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다. 

 

 

 

부처님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반대한

인류 평등주의자.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인도 사회는 카스트제도가 있었다. 즉 브라만·왕족·평민·천민 계급으로 나눠져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카스트제도를 반대하셨고, 어느 누구나 출가할 수 있도록 승가의 문을 활짝 열었다. 제자 중에 계율제일 우바리 존자는 이발사였고, 챤나 비구는 말[馬] 관리사였으며, 수니타는 분뇨를 청소하는 천민 출신이었으나 출가해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이외 비구니스님들에게 출가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구별할 수 있지만, 사람은 구별(천민과 바라문이라는 태생으로)할 수 없다. 인간들 사이의 구별은 다만 명칭에 의할 뿐이다.” 

 

“사람은 출신 성분으로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며, 태생에 의해 귀한 사람[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행위에 의해 귀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현 지금 인도는 이 계급제도로 나라가 발전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런데 2600여 년 전의 부처님께서 인류 평등을 존중하셨다. 이 점 때문에 불교가 전 세계 종교가 되었다고 본다. 

 

 

 

업과 윤회 사상

“전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지금 받고 있는 업이 이것이다. 다음 생의 일을 알고자 하는가? 지금 짓고 있는 행위가 다음 생의 과보이다.” 

 

불교에서는 ‘업[業, karma]’을 중시한다. 몸으로 행동하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것, 생각으로 나쁜 의도를 갖는 것 등 3업[身口意]이다. 이를 확장해서 10업[살생·투도·사음·망어妄語·기어綺語·양설兩舌·악구惡口·탐욕·성냄·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악업(惡業)을 짓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선업(善業)이 된다. 혹 어떤 사람이 악업을 지었다면, 다른 종교에서는 ‘신이 용서했다’고 할지 모르지만, 불교에서는 당사자가 업보를 받는다. 업은 피할 길이 없다. 지은 업보에 따라 윤회한다. 지금의 현 삶도 과거 자신이 지은 업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요, 현재의 자신의 행동에 의해 미래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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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스님 (대승불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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