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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이미령의 본생경 이야기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는 말을 하라

  • 입력 2023.03.27

삽화 | 견동한

세존께서 제타 숲에 계실 때, 여섯 명이 무리를 이룬 수행승들이 있었으니 경전에서는 그들을 육군(六群)비구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들은 온갖 좋지 않은 행동을 일삼았습니다. 특히 그 말씨가 매우 거칠었지요. 온화한 수행승들에게 싸움을 걸고 욕설을 퍼붓고 비웃고 덤벼들기 일쑤였습니다. 상대방의 이름이나 출생, 신체적인 특징 등을 집어서 놀림거리로 만들고 거칠고 잔인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수행승들은 견디다 못해 부처님에게 고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들을 불러 확인하신 뒤에 그들을 질책하며 말씀하셨지요.


“수행승들이여, 거칠고 난폭한 말은 동물들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전생에도 어떤 동물은 자신에게 거친 말을 건 사람에게 금화 천 냥을 잃게 만든 적이 있다.”


과거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들려주셨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살타로서 소로 태어났지요. 송아지였을 때 희생제 공양물이 될 운명에 놓였다가 사제(바라문) 한 사람이 돈을 주고 사왔습니다. 그리고 ‘큰 기쁨’이라는 뜻의 난디 비살라라 이름 지어주고 자식을 대하듯 사랑을 쏟고 애정을 다하며 길렀습니다. (보리살타인) 난디 비살라는 주인의 품에서 우유를 마시며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멋진 수소로 성장한 난디 비살라는 어느 날 생각했지요.


“나는 이 바라문에게 아주 큰 은혜를 입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더 힘센 수소는 없을 것이다. 수백 대 짐수레를 한 번에 끌 힘이 있으니 그것으로 바라문에게 보답을 해야겠다.”


어느 날, 그가 주인인 바라문에게 말했습니다.


“저, 바라문님. 이 도시에는 아주 큰 소떼를 거느리고 있는 부유한 상인이 있습니다. 그에게 가셔서 이렇게 제안을 해보십시오.”


난디 비살라는 바라문에게 자세하게 일러주었고, 그는 부유한 상인을 찾아가서 소가 일러준 대로 말을 건넸습니다.


“이 도시에는 누구네 소가 가장 힘이 셀까요?”


부유한 상인이 대답했지요.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소도 힘이 세고, 그러저러한 사람들의 소도 아주 힘이 셉니다.”


그러자 바라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습니다.


“천만에요. 이 도시에서 우리 집 소만큼 힘이 센 녀석은 없을 겁니다. 한 줄로 이어놓은 짐수레 백 대를 움직일 수가 있거든요.”


부유한 상인이 코웃음쳤습니다.


“짐수레 백 대를 소 한 마리가요? 과장이 심하시군요.”


“정 못 믿겠으면 내기를 해보십시다. 금화 천 냥을 걸어 봅시다.”


상상을 초월한 큰돈을 걸겠다고 하자 상인도 응낙했습니다.


바라문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서 난디 비살라를 준비시켰습니다. 짐수레 백 대에 모래와 자갈, 돌덩이를 가득 싣고 차례차례 차축을 그물로 단단히 이었지요. 그런 뒤에 난디 비살라를 목욕시키고 향료로 오지인(五指印: 백단과 향료, 이 있다고 여겨짐)을 찍었습니다. 이어서 소 목에 화려한 꽃다발을 걸고 제일 앞의 짐수레 나룻에 소를 붙들어 맨 뒤에 자신은 나룻에 앉았습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들긴 했습니다. 난디 비살라의 충직한 성품을 인정하기는 해도 백 대나 되는 짐수레를 끌 수 있으랴 싶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문은 채찍을 휘두르며 크게 소리쳤지요.


“이랴, 허풍쟁이야, 짐수레를 끌어라. 이랴, 거짓말쟁이야. 어서 움직여라.”


그러자 (보리살타인) 소가 생각했습니다.


‘나는 거짓말쟁이도 허풍쟁이도 아닌데 왜 우리 주인은 이렇게 나를 부르는 거지?’


난디 비살라는 주인의 외침을 듣고 네 발을 바닥에 딱 버티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기둥이 대지에 우뚝 선 것과 같았지요. 주인에게 내기를 제안해 놓고는 자기는 꿈쩍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랴, 이랴. 허풍쟁이야. 자, 어서 앞으로 나아가라!”


바라문이 아무리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를 쳐도 요지부동이었지요. 결국 바라문은 금화 천 냥을 부유한 상인에게 건넸습니다.


바라문은 큰돈을 잃자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소를 짐수레에 풀어준 뒤에 집으로 돌아와서 비탄에 빠져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난디 비살라가 천천히 집안으로 들어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바라문님. 주무시고 계십니까?”


바라문은 기가 막혔습니다. 소를 믿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할 밖에요.


“금화 천 냥을 잃었는데 잠이 오겠느냐?”


난디 비살라가 실의에 빠져 누워버린 주인을 내려다보며 말했습니다.


“바라문님, 제가 지금까지 주인님 집에 살면서 그릇을 깨거나 누군가를 쓰러뜨리고 짓밟거나 혹은 장소도 가리지 못하고서 대소변을 함부로 눈 적이 있습니까?”


이미 넋이 나간 바라문이 대답했지요.


“없었지. 너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저를 거짓말쟁이, 허풍쟁이라고 부르셨습니까? 그 말을 듣고도 내가 움직여야 했을까요? 그 큰돈을 잃은 것은 당신의 잘못이지 제 잘못이 아닙니다.”


난디 비살라는 다시 말했습니다.


“자, 그 사람과 이번에는 금화 2천 냥을 거십시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거짓말쟁이가 아닌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바라문은 서둘러 일어나서 부유한 상인을 다시 찾아갔습니다. 역시 앞에서와 똑같은 내기를 하자며 이번에는 금화 2천 냥을 걸자고 제안했지요. 상인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말도 안 되는 내기를 먼저 제안하고는 그 큰돈을 홀랑 잃은 이 바라문이 그야말로 실성이라도 한 건 아닌가 했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금화 2천 냥입니다. 마다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금화 2천 냥!”


바라문은 앞에서와 똑같이 백 대의 짐수레를 이어서 난디 비살라를 장식시킨 뒤에 가장 앞에 있는 수레 나룻에 연결시켰습니다. 멍에를 나룻에 단단히 묶어 한쪽 끝에 난디 비살라를, 다른 쪽 끝을 나룻 그물로 칭칭 말아서, 멍에 끝과 차축 사이에 껍질을 벗긴 나무 막대기를 걸치고, 그 나룻 그물로 단단히 묶어서 고정했지요. 이렇게 하면 멍에가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아서 소 한 마리로도 수레를 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문은 이 짐수레의 나룻 위에 올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채찍을 휘두르지 않고 난디 비살라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이랴, 어진 자여, 수레를 끌어라. 움직여라, 어진 자여.”


그러자 보리살타인 난디 비살라는 잘 이어진 짐수레 백 대를 단숨에 끌어서 뒤쪽 수레를 앞쪽 수레가 있던 곳으로 옮겼습니다.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를 치지 않고 그저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을 건넸는데도 소는 괴력을 내보인 것입니다. 부유한 상인은 졌습니다. 약속대로 바라문에게 금화 2천 냥을 건네주었지요. 이 신기한 내기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도 난디 비살라의 힘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저마다 난디 비살라에게 돈과 선물을 주었고 그 많은 돈과 선물은 모두 바라문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그는 보리살타 덕분에 아주 큰 재산을 모으게 되었지요. 

“수행승들이여, 거친 말은 이렇게 동물들조차도 좋아하지 않는다. 하물며 사람에게 건네는 말이 거칠고 험해서야 되겠는가?

기쁜 말만을 하라.
기쁘지 않은 말은 결코 하지 말라.
소는 무거운 짐을 끌었다.
그리고 주인에게 재산을 안겨주었고,
그로써 주인은 환희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게송을 들려주신 뒤에 거친 말을 일삼는 여섯 무리 비구들을 꾸짖으면서 거친 말을 금하는 계율조항을 정하셨지요. 그리고 과거 전생을 현재에 잇대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의 바라문은 아난다이고, 난디 비살라는 실로 나였다.” (본생경 28번째 이야기)

 


사람들은 불교가 묵언수행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생각합니다.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을 보아도 출연자들이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내내 ‘묵언’이란 푯말을 목에 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속에 살면서는 쉬지 않고 말을 해야 하고 마음에 없는 말도 건네야 하고 그러는 가운데 상대를 향해 거친 말과 원망이 섞인 말도 내뱉습니다. 그런 가운데 잠시 절에 머물 때만큼이라도 그 입을 다물어보게 하자는 취지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묵언 수행’을 통해서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걸 체험하게 됩니다.

사실 경전에서 부처님이 재가자에게 묵언을 강조하거나 당부하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불교는 침묵을 중하게 여기는 종교라기보다는 말을 잘 하기를 제안하는 종교입니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미사여구를 쏟아내며 상대방을 멋지게 설득하는 말솜씨를 의미하지 않지요. 사실 그대로를 보고 함부로 자신의 생각이나 추측을 덧붙이지 않고서 하는 말. 그리고 무엇보다 그 표현이 부드러워서 듣는 이로 하여금 자꾸 듣고 싶게 만드는 말이 바로 ‘잘 하는 말’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부처님을 가리켜서 “진리의 말만 하는 분(眞語者), 실다운 말만 하는 분(實語者), 있는 그대로의 말만 하는 분(如語者), 속이지 않는 말만 하는 분(不誑語者), 두 가지 말을 하지 않는 분(不異語者)”이라고 합니다. 부처되기 이전, 소로 태어나서도 자신의 주인에게 바르고 부드러운 말을 당부하신 선행이 있기에 우리는 부처님 말씀을 믿어 의심치 않고, 부처님 말씀 한 자락에 마음을 편히 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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