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곳에서는 등불이 되어 비추고, 질병의 고통이 있는 곳에서는 의왕(醫王)이 되시고, 고통의 바다에서는 배가 되어 건너게 해주고, 굶주림과 추위에서는 옷과 먹거리를 만들고, 빈곤한 곳에서는 마음대로 보물을 만들고, 속박되어 있는 곳에서는 해탈왕이 되시고, 감옥에서는 사면령을 내게하시고. 가뭄이 들 때에는 큰 비를 내리시고….’ 등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대면하는 모든 재난을 막아주시는 우리 곁의 친근한 부처님임을 강조하였다.
그 뒤에는 <직지>로 유명한 발원자인 친전사(親傳師) 백운(白雲 화상 경한)을 크고 진하게 썼으며 문장의 사이 사이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는 1078명에 이르는 시주자들의 이름을 빼곡하게 적었다. 확인은 어렵지만 공민왕의 몽고식 이름인 빠이앤티무르(大元 伯顔帖木兒 長壽)가 오래 살기를 비는 내용도 있다. 이 이름들은 글씨의 크기도, 굵기도 다르며 지우고 다시 쓴 이름까지 그 하나하나에 간절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그런데 발원문의 마지막 부분에는 4건의 작은 직물에 시주자의 이름을 적어 원문에 꿰맨 특이한 점도 발견된다. 이 역시 유일한 사례인데 두살배기 어을진(於乙珍)이 오래 살기를 발원하거나, ‘금산군부인전씨매의 丁女成男’이 주목된다. ‘정녀성남’은 아미타여래의 48대원에도 나오며 약사여래의 12대원 중 8번째 대원이다. 남성으로 변화시켜달라는 고려여인들의 적극성과 이를 실현시켜주는 약사여래의 강력한 영향력이 결합한 결과이다. 불상이 조성된 1346년의 고려후기는 혼인으로 이어진 원과의 관계, 곧 이은 왜구의 침략과 홍건적의 난이 시작되는 왕조 말기의 어수선하고 불안한 사회였다. 발원자들이 원하는 오래 살기를 희망하는 무병장수에 대한 염원은 당시의 사회상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약 20cm 크기의 오방색 번으로 이 역시 처음 발견된 작품이다. 번의 윗부분인 번두는 금사를 넣어 짠 아름다운 오방색에, 밑부분은 두겹으로 되어 펼칠 수 있는 구조이며 위에는 매달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색의 배합과 직조가 가능했던 고려의 기술적 우수성에 다시 한번 경탄을 하게 된다.
금낭(錦囊)인 비단주머니 역시 주황과 초록의 색 배합에 이를 묶은 긴 매듭은 어제 한 듯 정교하고 생생하다. 그 안에서 명주솜, 팔각, 곽향, 청목향 등이 발견되어 향을 담은 주머니임을 알 수 있다. 복장물에서 나온 아름다운 비단주머니는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에 쓰여 있는 각종의 향과 영락 등의 각 공양물을 오색의 실로 만든 주머니에 담아 간수하라는 내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온갖 도향과 말향과 소향과 화만과 영락과 번개와 기악으로서 공양하여 오색의 실로 주머니를 만들어 이를 갈무리하고 깨끗한 곳을 깨끗하게 치우고 높은 자리를 만들어 안치하면.’)
청양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은 불교중앙박물관이 주최하는 ‘만월의 빛 정토의 빛’ 기획전에 전체 복장물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만월의 빛’에 해당하는 장곡사 금동약사여래좌상은 복장물 전체가 처음으로 모두 공개되는데 6월 25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의 예배불상은 우리가 바라보는 눈높이보다 더 높은 곳에 있어 우러러 보며 예불을 드리게 된다. 그러나 박물관 전시실에서는 우리와 눈을 마주보며 바로 앞에서 불상을 감상하기 때문에 시각적인 느낌이 매우 다르다. 목은 길고 얼굴은 더 작아 보이는 비례의 차이 뿐 아니라 부드럽게 접혀진 옷주름과 손가락, 발가락, 손금까지 자세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눈 높이에서 바라 보는 전시실에서의 약사여래좌상과 원 사찰인 장곡사에서 예불을 드리는 약간 높은 위치에서 바라 보는 금동약사여래좌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알록달록 많은 꽃들이 피고 지는 완연한 봄날이지만, 바깥 세상과 달리 산사는 항상 절제된 채 부처님을 모시고 기도하는 조용한 공간이다. 일상을 살면서 휴식과 자유로움이 필요할 때, 산사의 고즈넉함과 여유가 필요할 때, 고려 귀족을 닮은 멋진 장곡사 약사부처님과 기분 좋은 교감을 해 보기를 권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