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반열반경>은 어떤 경전인가?
음력 2월 8일은 석가모니부처님 출가재일이고, 2월 15일은 열반재일이다. 부처님의 열반을 잘 묘사해놓은 경전이 있는데 <대반열반경>이다. ‘열반’은 죽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불어 끈다[吹滅]’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 즉 궁극적인 최고 경지를 말한다. 부처님의 완전한 죽음을 반열반[般涅槃, parinibbāna]이라고 하는데, 이 반열반도 두 가지로 나뉜다. 대체로 석가모니 부처님 살아 생전의 깨달음은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고 하고, 육신이 소멸된 죽음을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고 한다.
<대반열반경>은 아함부 경전인 장아함 2권∼4권에 해당하고, 장부경전(Dīgha-nikāya) 33경 가운데 하나이다. 경전의 내용은 부처님께서 만년에 열반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영취산을 출발하여 코티 마을∼나다카 마을∼상업도시 베살리∼입멸 장소인 쿠시나가라에 도착해 편안히 열반할 때까지의 여정을 그대로 묘사한 경전이다.
<대반열반경>의 내용
인간 붓다의 친근한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대승경전에서는 부처님이 신이한 모습이나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존재로 표현되어 있다. 반면 아함부 초기 불교경전에서는 다른 경전에서는 볼 수 없는 면이 있다. 곧 부처님의 인간적인 측면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몇 부분을 보면 이러하다.
“아난아! 나는 늙고, 몸이 많이 쇠하였다. 아난아! 나의 육신은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의해 매여 있는 것처럼 겨우 움직인다. 이렇듯이 나의 몸도 가죽 끈의 도움을 받아서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
“내 나이는 익을 대로 익고, 내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대들을 두고, 나는 떠나야 하리니 나는 오직 나를 따르노라. 그대들은 애쓰고 힘써서 생각을 바로 잡고 계를 지켜가라.
어느 날 세존께서 아침 일찍, 발우를 들고 베살리 마을로 탁발하기 위해 들어가셨다. 베살리 마을을 돌며 탁발 공양을 마치고 마을을 나오면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부처님께서 마치 코끼리가 사물을 바라보듯이 지긋이 베살리 마을을 바라보신 뒤,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여래가 베살리 마을을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제부터 반다 마을로 가도록 하자.”
아난아! 나는 그대들에게 늘 말하지 않았더냐?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할지라도 이별하고 헤어지는 때가 있느니라. 이 세상 모든 것들은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生住異滅]. 또한 어떤 물건이든 만들어졌다면 잠시 사용되어지다 언젠가는 없어지게 된다[成住壞空]. 머지않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3개월 후, 여래는 열반에 들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제 너희들에게 마지막으로 말하노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게 되어 있다. 게으름 피우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 꼭 수행을 완성토록 하여라.”
부처님과 아난, 몇 비구들이 쿠시나가라로 향해가는 도중 부처님께서 나무 아래 앉으시더니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너는 가사를 네 겹으로 접어 땅에 깔아라. 나는 너무 피로하다. 좀 쉬고 싶구나.”
진리 앞에는 남녀 빈부귀천이 없다.
부처님 재세시 베살리 마을에 암바팔리(ambaplālī)라고 하는 유명한 유녀(遊女)가 살고 있었다. 암바팔리는 부처님께서 베살리에 도착해 망고 동산에 머물러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수레를 타고 부처님께 찾아갔다.
암바팔리가 부처님께 인사를 올리고 한쪽에 앉으니, 세존께서 암바팔리에게 가르침을 설해주었다.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내일 여러 비구들과 함께 부디 저의 공양을 받아 주소서.”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허락하셨다.
암바팔리는 세존께서 수락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망고동산을 급히 떠났다. 마침 이때, 베살리의 명문 귀족인 리차비족 사람들도 부처님이 머물고 있는 망고동산으로 오고 있었다. 암바팔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고, 귀족들은 부처님 처소로 오는 길에 양쪽의 수레가 서로 부딪혀 리차비족의 수레가 전복되었다.
리차비족 사람들은 화가 나서 암바팔리를 꾸짖으며 말했다.
“암바팔리여! 그대는 무엇이 급해서 우리 수레를 전복시키는가?”
“어르신들! 용서해 주십시오. 실은 내일 부처님과 스님들을 공양에 초대하게 되어 마음을 서두른 탓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뭐라고? 부처님을 초대했다고?.... 그렇다면 암바팔리! 우리가 십만금을 줄테니, 내일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일을 우리에게 양보하지 않겠소?”
암바팔리가 안된다고 하자, 리차비족 사람들은 유감스럽게 여기며 세존이 계시는 망고 동산으로 향했다. 그들이 자리에 앉자, 부처님께서는 귀족들에게도 법을 설해주었다. 부처님 법문이 끝나자, 그들은 부처님께 간청하였다.
“세존이시여! 내일 암바팔리 여인의 공양청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청을 거절하시고 비구들과 함께 부디 저희들의 공양을 받아 주소서.”
“여러분의 마음은 고맙지만, 내일은 암바팔리의 공양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으니 여러분의 청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다음 날, 세존께서 사시 공양 때가 되어 발우를 들고 비구들과 함께 유녀 암바팔리의 집으로 향하셨다. 부처님과 비구들은 암바팔리 집에 도착해 마련된 자리에 앉아 공양을 마쳤다. 공양을 다 마치자, 암바팔리는 부처님께 자신의 정원을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위 경전 내용에서 엿볼 수 있는 점은 부처님의 평등한 자비이다. 유녀에게서 먼저 받은 공양청을 왕족들의 공양청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처님께서는 출가자에게도 빈부·귀천을 구별하지 않고 어느 누구든 발심만 하면, 출가도록 하였다. 이처럼 부처님은 계급과 성 차별을 뛰어넘은 휴머니스트였다.
유녀라는 말은 현대적으로 창녀라는 의미로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이지만, 부처님 당시에 유녀는 현대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다. 즉 고대 인도의 유녀는 가수이자 무용가요, 음악가로서 대우를 받았던 직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초기불교 경전에는 유녀라는 직업의 여인이 자주 등장한다. 부처님을 친견한 이후 암바팔리는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최고의 공덕을 쌓은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자 춘다.
부처님께서 파바 마을에 도착했다. 부처님께서 마을의 대장장이 춘다의 소유지인 망고 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춘다가 부처님께 공양청을 하자, 부처님께서 침묵으로 수락하셨다. 다음날, 춘다가 부처님께 스카라 맛다바(Sūkaramaddava)라는 공양을 올렸다. 부처님은 춘다의 공양을 드신 후에 피가 섞인 설사를 계속하는 병고가 시작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병이 심각하신데도 바른 사념(思念)을 갖추고 선정에 들어 병고에 흔들리지 않았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쿠시나가라로 향해 가자고 말씀하셨다.
이후 부처님과 제자들이 쿠시나가라(열반한 장소)로 향하는 3개월의 유행동안 부처님은 아난존자에게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또한 여러 제자들을 모이게 한 뒤 교단을 염려하고, 마지막 진리를 설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공양을 올린 춘다에 대해 이런 말씀도 하셨다.
“아난아, 여러 비구들이 ‘춘다가 올린 공양을 드시고 부처님께서 입멸했다’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아난아, 춘다에게 이런 비난이 쏟아진다면, 춘다에게 이렇게 위로하여라. ‘춘다여, 조금도 후회할 것 없소. 당신이 올린 최후 공양을 드신 뒤 부처님께서 입멸하셨다는 것은 당신에게 경사스러운 일이오. 부처님께 최후로 보시한 공덕은 다른 어느 때 공양보다도 매우 수승한 공덕이오. 그 공덕과 복덕이란 장수하며, 다음 세상에 좋은 세계에 태어나고, 안락을 누리며, 명예를 얻고, 천계에 태어날 수 있는 복덕이다.’ 아난아, 이렇게 춘다를 위로하고 변호해 주어라.”
아무리 위대한 성자이지만,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간 사람을 자비심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게다가 부처님께서 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춘다에게 쏟아질 비난까지 걱정하고 있다. 미국 철학자 월터 카우프만(1921∼1980)은 부처님의 최후 식사와 예수의 최후 만찬을 이렇게 비교하고 있다.
“부처님은 대장장이 춘다가 만들어 준 음식을 맛있다며 고마워 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춘다의 공양으로 인해 여래가 열반에 들었다.’고 춘다를 비난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예수는 만찬석에서 12인의 제자 중 한명인 유다를 저주하며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분명히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마태복음』)’라고 하였다.”
계를 스승으로 모시다[以戒爲師]
세존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아, 내가 입멸한 뒤, 너희들은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이제는 스승의 말씀만 남아 있지, 우리들의 큰 스승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라고. 그러나 아난아, 너희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내가 입멸한 후에는 너희들에게 설해 왔던 가르침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경전 원문대로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가르침과 계율이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以戒爲師].”라고 하였다. 부처님이 그러하셨듯이 역대 선지식들도 열반하면서 제자들의 계율을 걱정하셨다.
중국의 근현대 선사인 허운(虛雲, 1840∼1959)도 열반할 무렵,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법을 구하기 위해 신명을 바치고, 서로를 존중하라. 도량을 보존하고 청규를 지켜나가는 데는 오직 한 글자, 바로 계이다.”
계가 완성되어야 선정에 들 수 있고, 선정에 들어야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며, 지혜가 완성되어야 해탈할 수 있고, 해탈이 되어야 해탈지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 재세시에는 부처님 진신(眞身)이 진리였고, 계율이었다. 부처님이 열반하면, 부처님의 부재(不在)로 인해 승가가 해이될 것을 염려해 계율을 강조하셨다.
인도 아쇼카왕 때도 출가 승려들이 계율을 어기고, 안이하게 생활할 때, 장로들이 승가 화합을 위해 아쇼카왕의 도움을 받아 고군분투하였다. 또 12세기, 불교가 인도에서 사멸되었던 원인 중의 하나도 승려들의 계율이 해이했으며, 중국에서 일어난 법난도 대체로 승려 내부에서의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현 우리나라 불교도 법고창신(法古創新, 옛 정신사상을 토대로 하되 새로운 것에 변화를 주면서 창조해 나가는 것)이 필요한 때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