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조계사 뉴스

조계사보 칼럼

[연재완료] 정은우의 우리 곁에 오신 부처님

정릉 경국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 입력 2023.04.24

조각으로 보는 장엄한 극락정토의 세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줄여서 목각탱 또는 목각후불탱이라고 부른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귀중한 불교조각이자 회화로서 극락정토를 환상적인 아름다운 세계로 표현한 매우 귀한 작품이다. 목각후불탱은 조선시대 17~18세기에 만들어졌으며 6점 밖에 남아있지 않으며 모두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역적으로는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만들어졌는데, 서울에서는 정릉 경국사에서 1684년의 목각후불탱을 유일하게 볼 수 있다. 

경국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규모는 작지만 오랜 역사를 품은 아름다운 사찰이다. 원래 이름은 청암사(靑岩寺)였으며 조선시대인 1550년경 문정왕후가 부처님의 가호로 국가에 항상 경사스러운 일만 있으라는 염원에서 경국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경국사는 서울에 있는 해인사의 말사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주역인 백용성, 한용운 스님이 주석하였던 사찰이었다. 1953년 11월에는 닉슨 미국 부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승만대통령이 직접 안내하여 경국사에서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목각후불탱은 경국사의 주법당인 극락보전에 모셔져 있다.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보는 후불탱이 아니며, 그 앞에는 1742년에 만든 수락산 학림정사(水落山 鶴林精舍)에서 옮겨 온 석가여래와 미륵, 제화갈라로 구성된 석가여래삼존좌상을 모시고 있다. 이 목각후불탱은 170×177×30㎝ 크기로 5개의 은행나무 판목을 이어 붙여 제작하고 가장자리에는 나무로 틀을 만들어 조각상을 지지해주도록 고안되어 있다. 현재의 가장자리 틀은 후대에 새로 만들어 보강한 것이며, 틀에는 4卦(괘)와 ‘옴마니반메홈’ 범자가 쓰여 있고, 그 위에는 ‘근수정업왕생첩경(勤修淨業往生悽徑)’이라 쓰여 있는데 부지런히 정업을 닦으면 지름길로 극락왕생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목각탱의 구성은 존상 13구와 원패 형식에 명칭만을 쓴 사천왕이 3열로 정열되었는데, 위계가 정확한 부처의 권속들을 상하 좌우로 열을 맞추어 정확하게 배치한 것이다. 중앙에 위치한 본존불인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과 세지보살, 금강장과 제장애보살, 미륵과 지장보살 그리고 문수와 보현보살 등 팔대보살이 에워싸고 있다. 관음과 세지보살의 옆으로 양측에 아난과 가섭존자가 서 있으며, 가장자리에는 사천왕을 배치하는 등 각 존상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화면은 수미산에 있는 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밑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연꽃이 봉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피어 만개하는 모습으로 화면을 꽉 채웠으며, 연잎은 팔대보살의 광배가 되고 그 사이사이에는 구름으로 채워져 있다. 화면의 윗부분에는 광배에서 솟아나오는 상서로운 서기가 곡선을 지으며 좌우사방으로 뻗어나가, 땅과 하늘은 연꽃과 구름, 서기로 서로 연결되면서 시공을 초월한 3차원적인 공간감을 형성하였다. 

밑부분에는 연못의 물결에서 나오는 활짝 핀 연꽃을 연잎이 감싸는 구품연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극락정토의 세계에서 구품연지는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이다. 모든 중생을 상·중·하 삼품으로 나누고 각 품은 다시 각각 상·중·하로 나누어 구품으로 분류하여 이들이 극락에 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 각각의 방법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는 부처님의 약속인 것이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입체적인 높은 콧대에 아래를 굽어 보는 근엄한 모습이며, 두 손을 마주 잡아 합장을 한 가섭존자는 정수리가 볼록 솟아 원력을 나타내면서도 웃음을 띤 인자한 모습으로 대조를 이룬다. 

목각탱의 조사 과정에서 뒷면에 복장물을 넣고 나무 덮개로 막은 다음 그 위에 묵서가 쓰여 있음이 알려졌다. 그런데 육안으로는 안 보였던 각 존상의 명칭이 적혀있음이 적외선 촬영을 통해 발견되었다. 관음보살은 ‘관(觀)’의 약자를, 세지보살은 ‘데세(大勢)’ 미륵은 ‘미(彌)’를, 문수는 ‘문(文)’ 보현은 ‘보현(普賢)’ 지장은 ‘지장(地藏)’이라고 쓰여 있어 정확하게 도상을 이해하고 기록에도 밝은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시험적으로 몇 개의 복장의 나무 덮개를 제거하자 조성발원문과 개금중수발원문, 후령통 등 주요 복장물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목각후불탱은 1684년 2월에 전라도 대둔산 약사암에서 시작하여 5월 26일에 점안법석을 하였으며, 단응(端應)을 비롯한 6명의 승려조각가가 함께 작업하였음이 밝혀졌다. 즉, 목각후불탱은 1684년 2월에 전라도 대둔산 약사암에서 조성불사를 시작하여 5월 26일에 점안법석을 한 뒤 봉안되었다. 그리고 원 사찰에서 현재의 경국사로 옮긴 시기는 사찰의 여러 기록들을 참고해 보면 19세기말경 적어도 1902년 이전에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목각후불탱을 주도적으로 만든 조각가는 승려 단응이다. 그는 이 목각후불탱을 완성한 뒤 같은 해 9월 예천 용문사에서 더 큰 규모의 작품을 제자들과 함께 완성하였다. 어려운 공정의 목각후불탱을 1년에 2건 제작한 것이다. 

경국사 목각후불탱은 현재도 한치의 뒤틀림이 없이 잘 짜여져 있어 재료와 기술의 완벽성을 자랑한다. 목각후불탱의 내용도 그림으로 그려진 보배가 가득한 아름답고 즐거운 극락정토와는 다르게 구성되어 있다. 높은 곳에 앉아 왕생하는 구품연지를 바라보고 있는 아미타불, 연꽃과 잎, 가지들이 위로 솟아오르면서 보살의 대좌와 광배를 이루는 구품연지, 그리고 이를 구름과 서기가 합쳐지면서 장엄한 극락정토를 구현한 것이다. 여기에 사방은 사천왕이 호위하며, 하늘 공간에는 과거칠불이 증명하는 공간을 이룬다. 불화에 그려진 것보다 더 엄격하면서도 장엄한 극락정토의 모습인 것이다. 

세부적인 모습을 보면 더욱 놀랍다. 연못을 상징하는 물결위에 구품연지를 구성한 다음 그 위에 수미산을 배치하였는데 불상 뒤 광배까지 산을 연결하여 극락정토를 더욱 3차원적 입체 공간으로 이끈다. 또한 하늘로 뻗쳐있는 상서로운 서기는 화면 전체로 확대되어 장엄한 하늘세계를 웅장하게 표현하였다.
그 사이 사이의 배경은 연꽃으로 채워져 있다. 연꽃은 밑에서부터 작게 피어나기 시작하는데 봉오리에서 부터 점점 피어오르는 활짝 핀 연꽃은 보살의 대좌가 되고 큰 연잎은 보살과 제자의 광배가 되며 이는 하늘의 구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는 모두 경전에 등장하는 보배 연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토삼부경>에 표현된 문자 속의 정토를 조형화하고 조각으로 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조각가이자 승려였던 단응은 목각후불탱을 통해 경전에 표현된 극락정토를 아미타불을 둘러싼 보살과 수미산과 높은 연화대좌, 연꽃과 구름, 서기라는 조형요소를 이렇게 아름답고 극적인 공간으로 표현하였다. 실로 천재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조선 17세기의 천재 조각가 단응스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극락 정토의 세계인 것이다.

조성발원문에는 비어 있는 공간에 결원에 동참하기를 권하는 <여각각결원동참서(與各各結願同參書)>가 쓰여 있다.

함께 화엄세계로 귀의하여 모두 깨달음의 언덕에 올라 함께 (금선)대법륜을 이루어 부처님의 대은에 보답하며 사은에 보답하여 중생을 구제하기를 기원합니다.
(同歸華嚴世界 具登覺岸同證 金屳轉大法輪報佛大恩 酬報四恩救濟三有 也) 

후불탱과 달리 만드는 비용이 많이 들고 제작 공정도 까다로운 아름답고 환상적인 목각후불탱, 약 100년간, 몇 개의 작품만 만든 세계유일의 독창적인 목각후불탱, 가히 조선후기 불교조각의 꽃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자랑스러워해야 할 문화유산인 것이다. 

 

정은우 (부산박물관 관장)

저작권자 © 미디어조계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