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 앞에 한 무더기의 꽃이 피었는데,
그 빛깔 선명하기가 어떤 꽃보다 낫구나.
신농씨(神農氏)는 옛날에 뭐라 이름 지었을까?
사람들이 불정화(佛頂花)라 부르는 게 나는 좋아라!
庭前惟有一叢花 其色鮮明勝雜花
정전유유일총화 기색선명승잡화
神農昔日名何作 我愛人稱佛頂花
신농석일명하작 아애인칭불정화
용담조관(龍潭慥冠, 1700~1762), 「불두화를 노래하다(詠佛頭花)」
꽃이 활짝 핀 불두화 나무는 우리나라 사찰 지도 같다. 이 꽃송이는 통도사, 이 꽃송이는 해인사, 이 꽃송이는 송광사, 그리고 저 꽃송이는 신계사 등 우리나라 곳곳에 자리한 사찰들이 많기도 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라. 한 꽃송이 속에 또 수많은 꽃들이 있다. 하나하나 세어보라. 워낙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서 헤아리기 힘들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나라 사찰들마다 얼마나 많은 스님들과 신도들이 있고, 얼마나 많은 선지식들이 탄생했는가? 그들을 어찌 다 일일이 헤아린단 말인가? 스님들과 신도들과 선지식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아름다운 한 송이 꽃을 피운 것이다. 큰 꽃송이 속에 자리한 작은 꽃들도 자세히 보면 참 아름다운데, 참 신통하게도 작은 꽃들은 어떤 주장도 없이 그저 한 송이 꽃을 만드는 것에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 그래서 수많은 꽃들이 모였지만, 한 송이 꽃으로서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해마다 부처님오신날 무렵이면 우리 절 마당 여러 곳에 불두화(佛頭花)가 핀다. 커다란 공처럼 생긴 큰 꽃 앞에서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 꽃 이름이 뭐래요?”
“불두화입니다. 부처님의 머리카락처럼 곱슬곱슬한 꽃잎이 공처럼 둥글게 뭉쳐 있어서 마치 부처님의 두상과 같다고 하여 ‘불두화’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 이름 때문일까? 부처님을 연상시키는 불두화 한 그루쯤 없는 절은 드물다. 불두화를 보고 있으면, 고봉으로 담은 쌀밥이 연상되기도 하고, 잘 뭉친 주먹밥이 연상되기도 한다. 불두화는 또 뜨개질을 위한 실뭉치 같기도 하고, 부드러운 솜사탕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이 꽃이 부처님의 두상을 닮았다고 생각했기에 불두화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참으로 뛰어난 작명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박윤묵(朴允黙, 1771~1849)은 한없이 고요하게 느껴지는 불두화를 보고 “불이문 앞에서 모든 사람이 선정에 들었네(不二門前盡人禪)”(「영불두화(詠佛頭花)」)라고 노래했다. 불이문 옆에 피어 있는 불두화를 한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자, 불두화 꽃송이 하나하나가 모두 선정에 들었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만큼 불두화는 절집에서 우리의 발길을 붙들어놓는 신비한 꽃이다.
용담조관 선사는 불두화라는 이름에 관심이 많다. 선사는 신화 속에서 농사짓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하는 신농씨가 불두화를 뭐라 이름지었을까 궁금하다. 아마도 신농씨는 풍족한 음식과 연결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그 어떤 이름도 불두화라는 이름에 미치지는 못할 것 같다. 그만큼 불두화는 부처님의 원만한 외모뿐만 아니라 자애로운 성품을 꼭 빼닮았다.
영국의 불교학자 루퍼트 게틴(Rupert Getin)은 갖가지 경론을 살펴보고 부처님은 출가 이후 출가할 당시에만 삭발하고, 그 이후에는 한번도 삭발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는 부처님께서 출가하여 칼로 머리를 자르자 3센티미터쯤 남은 머리가 오른쪽으로 세 바퀴쯤 말렸는데, 그 상태가 평생 갔다고 말한다. 그래서 불상에 표현된 부처님의 두상이 한결같이 불두화처럼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선사는 불두화 대신 또 하나의 이름을 알려준다. ‘불정화(佛頂花)’이다. 이 이름은 ‘부처님의 정수리’를 닮았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정수리는 조금 튀어나와 있는데, 이를 ‘육계(肉髻)’라고 한다. 불상의 육계는 머리카락 없이 맨살로 표현되기도 하고, 부드럽게 말린 머리카락이 그대로 남아 있는 채로 정수리 부분이 둥글게 튀어나온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맨살이 드러난 육계를 부처님의 정수리라 생각하면 불정화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지만, 머리카락을 표현한 육계가 부처님의 정수리라면 용담조관 선사처럼 불정화라는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 것 같다.
지금 불두화가 곳곳에 피어 있다. 불두화를 볼 때마다 부처님을 만난 듯 반갑다. 어쩌면 이렇게 원만한 꽃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원만하지 않은 꽃이 있을 리 없지만, 더 원만하게 느껴지는 꽃은 있을 터, 불두화가 바로 그렇다.
나는 불두화가 화합을 최상의 덕목으로 삼는 승가(僧伽)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화합 대중의 개개인이 갖추어야 할 최상의 덕목이 원만함인데, 불두화야말로 원만함의 극치이며, 게다가 큰 꽃송이를 이루는 작은 꽃들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모두 큰 꽃송이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도량 전체에 피어 있는 불두화를 순례해본다. 그러고 보니 우리 절 도량 내 불두화의 분포도를 그리면 전세계의 승가 지도가 될 것 같다. 인도아대륙 쪽, 그 밑 섬나라인 스리랑카에, 동남아시아 쪽에, 티베트 쪽에,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 불두화, 아니 승가가 존재한다. 나라마다 승가가 있고, 그 승가에도 수많은 사원과 신행단체들이 존재하지만, 그들의 존재 이유는 불두화 꽃송이가 작은 꽃들로 둥글게 뭉쳐 있듯이 하나로 뭉친다. 그들은 모두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함으로써 세상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사원과 신행단체 속에서 수많은 수행자들이 한 송이 불두화같이 아름다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불두화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사찰 지도를 떠올리면서, 전 세계의 승가 분포도를 만들어보면서, 은사스님이 늘 강조하는, 틱낫한 스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미래의 부처님은 공동체의 모습으로 오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