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년 의상(義湘,625~702)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조선 세조와의 전설을 가득 담은 낙산사. 산과 바다와 면해있어 여름이면 다시 가 보고 싶은 아름다운 사찰이다.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에 위치한 낙산사(洛山寺)는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천혜의 절경과 일출로 잘 알려져 있으며 관음신앙의 성지로 더욱 유명하다. 사실, 낙산사에는 관음에 대한 설화가 많이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의상대사와 관련된 관음 친견과 수정염주 설화가, 고려시대에는 보타낙가산에 계신 관음보살상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려 1211~1278년에는 보타낙가산에 있는 관음보살이 들불로 전각과 함께 불에 탔다거나, 같은 시기(1277~1280년)에 대나무가 땅에서 솟은 곳에 금당(金堂)을 짓고 소상(塑像)을 만들어 모셨다고 전한다(『東文選』卷110, 疏, 洛山觀音慶讚疏, 『三國遺事』塔像 第四 洛山二大聖 觀音正趣
실제로, 낙산사의 관음도량인 원통보전(圓通寶殿)에는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이 봉안되어 있다. 이 관음보살좌상은 총높이 141.5cm, 무릎 너비 76.2cm의 등신대 크기에, 재료는 삼베와 옻칠을 이용하여 만든 건칠상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안정적인 비례감과 정교한 기법, 화려한 장신구, 별도로 만들어 씌운 높은 보관 등이 돋보이는 특징이다. 얼굴은 좁은 이마에 두터운 눈두덩이, 눈꼬리가 올라간 긴 눈매, 입술선이 또렷한 입, 외이도까지 표현된 사실적인 귀 등 뚜렷한 이목구비는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보관을 벗기면 상투형의 높게 솟은 보계가 눈에 띄는데 금빛으로 채색한 앞 꽂이 장식과 주로 여래상에서만 발견되는 둥근 계주가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이마 경계선의 앞머리와 뒷머리는 촘촘히 빗질하듯 세밀하게 새겼으며 한 가닥의 보발이 귀 뒤를 돌아 어깨로 늘어뜨려 다섯 개의 고리를 만들고 다시 여덟 가닥으로 나뉘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린다. 따로 만들어 끼운 손은 오른손을 가슴 부위에, 왼손은 무릎 가까이에 둔 상태에서 엄지와 중지를 자연스럽게 구부렸다. 손바닥에는 ‘井’자의 손금이 새겨져 있으며 손가락은 길고 도톰하다.
무엇보다도 낙산사 보살상의 가장 큰 특징은 높은 보관과 보석이 박힌 목걸이, 팔찌, 영락 등의 장식에서 오는 정교성과 화려함이다. 보관은 마치 왕관 같은 형태로 앞은 3개의 판, 뒤는 2개의 판을 서로 연결하여 부착하였다. 보관의 앞면은 연꽃과 연잎, 작은 꽃, 넝쿨, 봉황 등을 세밀하게 투각하였고 상단과 중단의 테두리에는 화염보주문을 세워 장식하였는데,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중앙에 보석을 감입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보관 문양은 연밥까지 표현된 활짝 핀 연꽃과 연봉우리로 구성되었으며 뒷면에는 긴 꼬리를 날리며 날개를 편 두 마리의 봉황이 있다. 푸르고 붉은 보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웠을지 상상해 본다.
신체에 장식된 영락은 원형과 능화형 꽃, 연봉, 세 갈래로 갈라지는 장식술 등이 작은 구슬로 서로 이어져 어깨, 팔, 배, 무릎, 등의 신체 전체를 감싸고 있다. 크고 작은 꽃무늬들의 중앙과 테두리에는 마노나 석류석 같은 붉은색과 터키석의 푸른 보석으로 장식하여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배가시켰다. 온몸에 걸친 옷자락은 무릎 밑으로 흘러내려 질서정연하게 주름을 잡고 무릎 밑으로 흘러내려 대좌를 덮은 상현좌로서 건칠관음보살좌상의 특징 중 하나이다. 부드럽게 접힌 옷주름과 그 위에 걸쳐진 화려한 영락 장식, 중간중간 영롱한 보석으로 연결된 균형과 조화미는 인간의 솜씨인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이 건칠관음보살좌상의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양식적 특징에 의한 고려후기 설과 조선의 세조와 연관된 조선초기 15세기로 보는 두 가지 의견이 있다.
이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언제부터 이곳에 봉안되었을까? 먼저, 한국전쟁 이후 전소된 사찰을 1953년 중창하는 과정에서 주존불을 설악산 영혈사(靈穴寺)에서 모셔왔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가장 주목되는 기록이 『속동문선』에 전한다. ‘조선 1485년 지생이 아침 식사를 대접하고 나를 인도하여 관음전(觀音殿)을 구경하였는데 관음상(觀音像)은 제작한 기술이 극히 정밀하고 교묘하여 정신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續東文選』권21, 錄, 遊金剛山記)라는 내용이다. 이 기록은 현재의 관음보살상과 잘 맞는 묘사여서 현재의 보살상이 당시에도 봉안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낙산사는 2005년 대화재로 동종을 비롯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된 바 있다. 그러나, 원통보전의 건칠관음보살상은 이 때 화재에서 벗어났다. 건칠이라는 가벼운 재질 때문에 쉽게 다른 곳으로 이운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적기>에는 조선 1777년 낙산사가 불타니 원통보전은 화를 면하였다고 하였다.(『乾鳳寺本末事蹟』 洛山寺) 옛부터 현재까지 산불로 인한 화재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인간이 처한 최대의 자연재해이다. 낙산사도 몇 백년 마다 대화재가 반복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1489년, 1592년, 1631년, 1777년, 1950년 그리고 2005년 최근까지 여러 차례의 화재와 전란으로 사찰이 불타고 재건되면서 현재에 이른다. 앞서 지적한대로 낙산사는 1777년 대규모 화재가 났고 원통보전 이외의 모든 전각이 불탔다고 쓰여 있다. 또한, 2005년의 대화재는 대한민국을 망연자실에 빠뜨린 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1777년 이후 277년만인 2005년, 원통보전과 관음보살상은 또다시 대화재에서 벗어났다. 낙산사의 관음보살과 그 전각은 화재도 물리치는 위신력을 발휘하였다. 불길에 뛰어든 스님들의 노력은 물론, 모두의 기도와 진심이 통한 것이리라.
의상대사가 관음을 만난 영험기에 따르면, 낙산사의 명칭은 보타낙가산에서 기인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방광불화엄경> 입법계품에 관음보살은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보타낙가에 거주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며 선재동자의 방문을 받아 설법한다.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625-702)이 창건한 낙산사는 화엄경 내용에 입각해 사찰의 성격을 규정하고 주존불을 관음보살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현재 건칠관음보살좌상이 봉안된 전각도 원통보전이다. 원통이란 모든 소리를 두루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낙산사의 원통보전은 고려시대까지는 전각, 금당 또는 불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관음전 또는 원통보전이라 불렸다. 남효운이 1485년에 쓴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낙산사에 들러 관음전에서 관음상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1777년의 사적기에는 원통보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낙산사 관음보살상은 복장물이 있지만 개봉하지 않았다. 다만, X-ray 촬영 사진을 통해 마치 후령통과 수정염주같은 꾸러미가 상 내부에서 확인되었다. 원래, 낙산사는 관음보살이 의상대사에게 건넸다는 수정염주 설화로 유명하다. 물론, 그 수정 염주는 아니겠지만 설화와 연관되어 흥미로운 복장물을 품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고침입 때 낙산사의 두 보물인 여의주와 수정염주를 왕실 곳간인 어부(御府)에 보관하였으며, 1275년에는 충렬왕이 직접 낙산에 행차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하고 학열스님에게 중창 불사를 지시하게 된다. 예종이 발원한 범종의 명문에는 1466년 세조가 낙산사에 거동했을 때 관음보살의 분신사리현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낙산사는 의상대사의 창건이래 당대 최고의 승려와 왕실, 이어지는 영험담 등 관음신앙의 주요 도량이자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창건 이래 낙산사의 모든 역사와 전설, 신앙을 품은 유일한 문화유산인 원통보전의 건칠관음보살좌상이 있다. 2005년의 낙산사 대화재 당시 동종이 녹아 없어지는 불길 속에서 낙산사 스님들이 지켜낸 관음보살상, 또 하나의 일화를 추가하며 새로운 신화와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