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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 이미령의 본생경 이야기

덤불 속에서 술을 마시던 사내

  • 입력 2023.07.01

삽화 | 견동한

옛날 바라나시에 일리사라는 이름을 가진 부자상인이 살고 있었지요.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자신들의 재산을 사람들에게 널리 베푸는 일을 해왔습니다. 아예 집에 보시당(布施堂)이라 부르는, 보시 하는 공간을 따로 두어 수행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지요.

일리사는 집안의 어마어마한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습니다. 부모에게서 가장의 자리를 물려받자 그는 가장 먼저 보시당을 불 질러 버렸습니다. 단 한 푼도 다른 이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수행자들이 그의 아버지 때 일을 떠올리며 탁발을 하러 오면 수모를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멸시와 구타를 당하고 쫓겨났습니다. 나누며 살면 서로에게 행복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같은 건 그에게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점점 아귀처럼 변해갔고 그 모습 역시 흉측하기 짝이 없어져갔습니다. 예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던 그의 집에 인적이 끊겼습니다. 사람들은 물귀신이 살고 있는 연못처럼 그의 집을 멀리서부터 피해 다녔지요. 

어느 날, 그가 왕궁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웬 남자가 술을 잔 가득 붓고서 큼큼한 냄새를 풍기는 생선 한 마리를 안주 삼아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일리사에게 군침이 돌았습니다. 여행길에 지쳐 있던 터라 빨리 집에 가서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순간 그의 뇌에 빨간 불이 켜졌습니다.


‘아서라. 집에 가서 술을 마시면 집안 식솔들이 죄다 한 잔 얻어먹으려고 덤벼들 게다. 왜 그들 때문에 내 재산을 탕진해야 해?’


술 한 잔 하고픈 마음이 싹 가셨습니다. 하지만 길을 걸어가자니 목은 점점 말라왔고 자신의 술을 탐내는 식구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술 한 잔 마시고픈 갈망과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인색함이 마음에서 다툼을 벌이자 그의 낯빛은 시커멓게 변했고 힘줄까지 불거졌습니다. 아내는 돌아온 남편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내가 당장 당신 혼자 마실 양의 술을 빚겠다’고 말했습니다.
일리사가 거절하며 술집에 가서 자신이 마실 만큼의 술을 사오라고 이른 뒤에 하인에게 들려서 집밖으로 나갔습니다. 집을 나와 대로변 덤불 속으로 들어간 그는 하인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게 한 뒤 술을 따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이 모습을 처음부터 지켜본 이가 있었지요. 인간으로 살면서 보시와 같은 선행을 많이 한 과보로 하늘의 신 제석천으로 태어난 그의 아버지입니다. 인간세상을 내려다보던 제석천은 술 한 모금도 아까워서 덤불 속에 들어가 혼자 홀짝홀짝 술을 마시고 있는 아들을 보자 가슴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 제석천은 인간 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아들과 아주 똑같이 모습을 바꾼 뒤에 (전생에 자기 집이었고, 지금은 아들이 주인인) 집으로 향했습니다. 집안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 사람이 진짜 일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문지기를 불러 당부했지요.

 
“혹시 나를 닮은 자가 문 앞에 얼씬거리거든 흠씬 두들겨 팬 뒤에 멀리 쫓아버려라.”


그리고 아내를 불러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부인, 우리 이제부터 보시를 합시다.”


일리사의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하인들은 어리둥절했지요.


‘보시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하게 하더니 웬일일까? 낮술에 취한 걸까?’


늘 남편의 인색함이 안타까웠던 아내는 그의 마음이 변할까봐 흔쾌히 말했습니다.


“그러세요, 여보. 하고 싶은 대로 맘껏 보시하세요.”


(제석천이 변장한) 일리사는 사람을 시켜 거리를 다니며 북을 두드리면서 재물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오라고 알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는 칠보로 가득 차 있는 창고를 활짝 열었습니다. 사람들은 재물을 밖으로 끌어낸 뒤에 양껏 가지고 돌아갔지요.

그때 어떤 가난한 사람이 일리사의 소에 칠보를 가득 담은 수레를 메고 돌아가면서 너무나 행복해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일리사님에게 행운이 있기를! 당신의 보시 덕분에 평생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의 재산은) 오직 당신의 수레, 당신의 소, 당신 집의 칠보입니다. 이 모든 것은 어머니가 주신 것도 아니요 아버지가 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당신 덕분에 얻은 것입니다. 일리사님!”


그때까지 자기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른 채 덤불 속에 숨어서 술을 마시고 있던 (진짜) 일리사는 이 남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저 자가 대체 뭐라는 거야? 어찌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며 얼토당토 않는 말을 지껄이는 거야? 혹시 내가 집을 비운 사이 왕이 내 재산을 세상 사람들에게 다 줘버리기라도 한 걸까?”


허둥지둥 덤불에서 나온 일리사는 낯선 남자가 자신의 소와 수레를 끌고 가는 광경을 보고는 달려가서 소 고삐를 움켜잡았습니다.


“네 이놈! 내 소와 수레를 네 놈이 왜 끌고 가느냐!”


“놓아라. 이놈아! 감히 네 놈이 일리사님께서 주신 것을…!”


“내가 그 일리사다, 이 도둑놈아!”


두 남자가 소 고삐를 서로 끌어당기며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하지만 일리사는 그 남자를 이기지 못했지요. 머리채와 멱살을 잡히고 팔꿈치로 가격을 당하고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말았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달려간 일리사는 그의 재산을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붙잡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일리사를 패대기치고 주먹질을 했습니다.


그가 간신히 정신을 수습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번에는 문지기가 그를 내쫓았습니다. 문지기에게 마저도 수모를 당하자 그는 왕이 명령한 것이라고 단정 짓고 한달음에 왕궁으로 달려갔습니다.


“폐하, 대체 무슨 까닭에 저의 모든 재산을 함부로 나눠주신 것입니까?”


왕이 말했지요.


“부호상인이여, 그대가 큰북을 울려서 보시한 것 아니던가?”


“폐하, 저는 그러라고 시킨 적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제가 얼마나 제 재산을 아끼는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풀잎 끝에 묻힌 기름방울만큼도 남에게 보시하지 않습니다. 보시한 자를 불러서 사실 여부를 가려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알리사로 모습을 바꾼) 제석천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너무나 똑같아서 진위를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을 불러 들였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오히려 그의 가족들은 너그럽게 베풀자고 제안한 제석천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지요. 


“이 분이 진짜 일리사님입니다.”

제석천 손을 들어준 가족들이 너무나 야속했지만 일리사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그렇지. 내 머리에 종기가 나 있는데 가족들은 그걸 모른다. 하지만 내 이발사는 알고 있으니 그를 부르자.’

이발사가 불려 와서 일리사의 머리카락을 헤집고 종기를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제석천은 재빨리 자신의 머리 똑같은 곳에 종기를 만들어 냈지요. 믿었던 이발사마저도 진위를 가리지 못하자 일리사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재산을 다 날린 데다 피붙이마저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요. 아들의 비참한 몰락을 지켜보던 제석천이 그때야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대왕이시여, 이 자가 진짜 일리사입니다. 저는 제석천입니다.”


그리고 더할 수 없이 우아한 모습으로 날아올라 일리사의 입을 열어 물을 흘려 넣었습니다. 간신히 깨어난 일리사는 신들의 왕인 제석천을 보고 허둥지둥 절을 올렸습니다. 그러자 제석천이 말했지요.

“일리사여, 나는 네 아버지이다. 이 재산은 내 것이지 네 것이 아니다. 나는 보시와 같은 선행을 해서 제석천이 되었는데, 너는 내가 애써 가꾼 전통을 없애고 보시를 하지 않았으며 네 자신을 위해서도 재산을 쓰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주지 않고 있다. 귀신에라도 쓰인 것이냐? 이제라도 보시하지 않는다면 네 재산을 전부 없애버릴 것이요, 이 금강저로 네 머리를 부수어 목숨을 빼앗아 버리겠다.”

일리사는 사색이 되어 떨면서 약속했습니다.


“지금부터 보시를 하겠습니다.”

그의 다짐을 받아낸 제석천은 공중에서 법을 설하여 아들에게 계를 지키도록 이른 뒤에 천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일리사 또한 보시를 비롯한 많은 선행을 하고서 죽은 뒤 천상에 태어났지요.

세존께서는 이 일을 들려주시며 전생을 현재에 잇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일리사는 지금의 탐욕스런 부호상인이며, 제석천은 목갈라나이며, 왕은 아난다이고, 이발사는 나였다.”


(본생경 78번째 이야기)

부처님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려주는 법문은 ‘보시’입니다. 재물을 움켜쥐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단 한 푼도 내놓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본생경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흉측한 외모에 힘줄이 불거져 나온 굶주린 아귀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인색한 사람에게 있어 가장 안타까운 점은 그 재산을 자기 가족에게도 베풀지 않고, 심지어 자신에게도 베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벌고 재물을 모으는 이유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나와 내 가족이 여유롭게 살기 위함입니다. 재산을 어느 정도 갖추면 ‘내가 노력해서 이만큼 이뤘다. 전부 내 땀과 노력 덕분이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저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재산이 모여질 리 없습니다. 내가 일을 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뒷바라지 했고, 누군가가 함께 일했고, 누군가가 돈을 내고 사줬고, 누군가로부터 특별 혜택을 받은 덕분입니다. 심지어 내 재산이 형성되기까지 누군가가 양보를 하거나, 누군가의 몫이 내게 왔거나, 어딘가의 환경이 피폐해졌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술 한 잔 나누는 것도 아까워하던 이가 끝내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는 과정이 너무 극적이지만 재산이란 것이 그렇지요. 내가 잘 쓰지 않으면 언젠가는 그렇게 흩어지고 마는 법! 단 한 푼의 재산이라도 잘 쓰고 함께 즐거워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경제공부가 아닐까요?


이미령 (경전 이야기꾼, 불교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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