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 높이 208.2cm, 무릎 폭 150.9cm, 조선 1607년
백양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로 백암산의 백학봉 남쪽 산기슭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소요대사 태능(1562-1649)의 승탑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나무(고불매)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천년고찰이다.
백양사의 원래 이름은 백암사였지만 오랫 동안 정토사로 전해 왔다. 정도전(1337-1398)은 『백암산정토사교루기(白巖山淨土寺橋樓記)』에 “신라 때 어떤 승려가 절을 짓고 살면서 백암(白巖)이라 하였고, 423년 정토선사(淨土禪寺)로 이름을 바뀌었다”라고 하여 절의 오랜 역사와 원래의 이름을 밝혔다.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 장성현 불우조에도 정토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750년에 제작된 『해동지도』에 비로소 ‘백양사(白羊寺)’가 등장한다. 따라서, 정토사에서 18세기경 현재의 백양사로 사명이 바뀌었지만, 정토와 관련된 사찰의 역사와 신앙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 백양사에는 정면·측면 각 3칸의 단층 맞배지붕형식의 극락보전 내부에 주불인 아미타여래좌상 1존이 낮은 팔각대좌위에 안치되어 있다. 극락보전은 1574년(선조7) 승려 환양(喚羊)이 중건한 백양사에서 가장 오래된 법당으로 원래 정토사의 주불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소개하는 1607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만들어 주존불로 모셔 오늘까지 이어진다.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208cm 크기로 독존불로서는 매우 독보적인 규모이며, 불상 크기에 비해 낮은 삼단으로 구성된 팔각대좌 위에 봉안되어 있다. 대좌는 여러 개의 나무를 이어 붙여 만들었는데, 그 밑면에 ‘후면첩합(後緬疊合)’이라는 묵서가 있어 앞면과 뒷면을 접합하였음을 기록한 섬세한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대좌의 중대에는 구름 모양의 안상을 두고 그 안에 꽃을 조각하였으며, 윗면에는 난간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꽂았던 구멍만 남아 있다. 그런데, 2017년 10월 불상을 안치한 대좌의 안쪽 윗면에서 불상 조성과 관련된 중요한 묵서가 발견되어 불상과 대좌가 1607년에 함께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묵서는 다음과 같다.
만력삼십오년정미중한일조성지기
원아불상조성지연고선왕선후조종열위선가방성불도좌
연대 주상삼전수만세 화원질 현진비구 휴일비구
문습비구 지전 휘정비구 반두 혜원비구
숙두 응상비구 별좌 종도비구 화주 쌍원비구
(萬曆三十五年丁未中寒日造成之記 願我佛像造成之然故先王先后祖宗列位仙加方成佛道坐 蓮臺 主上三殿壽萬歲 畵員秩 玄眞比丘休逸比丘文習比丘 持殿 暉正比丘 飯頭 惠貟比丘 熟頭 應祥比丘 別座 宗道比丘 化主 双願比丘)
묵서 내용은 제작시기, 발원내용, 소임자 순으로 매우 간단하다. 그러나, 이를 통해 1607년 초겨울에 만들었으며 불상 제작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한 화주는 쌍원, 조각승은 현진, 휴일, 문습비구가 참여하였다는 중요한 사실들이 밝혀졌다. 불상을 만들면서 한 서원도 담겨 있다. 돌아가신 선왕과 왕후, 왕실의 조상들이 불도를 이루어 연화대에 앉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즉, 돌아가신 조상들이 깨달음을 얻어 극락 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어서 주상삼전하가 오래살기를 기원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삼전하는 주상과 비, 세자를 가리킨다. 이는 조선시대 발원문에 쓰는 의례적인 축원문이다.
발원문의 마지막 화원질에는 이 불상을 만든 조각승을 밝혔다. 수조각승은 17세기 최고의 조각가 현진비구로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이다. 지금까지 현진비구가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작품은 17세기초부터 중엽경까지 명문이 있는 작품만 14건이며 거의 보물로 지정될 정도로 우수성을 자랑한다.
대좌의 묵서 이외에도 2005년 2월 복장유물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 가운데 1741년(영조17) 명부전의 시왕상 중수와 함께 개금불사를 시행했다는 복장기 (26.1×131.5cm)와 1775년 개금불사를 시행했다는 중수기문(45.2×59.6cm)이 함께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이 불상은 1607년 11월에 조성된 다음 1741년과 1775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와 개금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불사 중수에는 18세기에 활동한 최고의 조각승과 불화승들이 다수 참여하여 이 불상의 가치를 증명한다. 특히 두 번째 중수를 맡은 불화승 색민은 같은 해인 1775년에 그린 <장성 백양사 아미타설법도>가 성보박물관에 남아 있다.
이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첫 느낌은 2m가 넘는 크기에 낮고 넓은 무릎, 긴 허리가 주는 독특한 비율로 장대하고 압도적인 형태미이다. 이러한 미감은 곧고 반듯한 자세에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표정에서 더욱 배가된다. 머리에는 육계가 있고, 그 중앙과 정상에는 반달모양의 중간계주와 반구형의 정상계주를 표현하였으며, 넓은 이마에는 백호가 있다. 방형의 얼굴에 가늘고 긴 눈, 완만하게 뻗은 콧등, 양감이 있는 양 볼에 입술은 얇은 편이며 입가를 살짝 눌러 옅은 미소를 머금어 자비로운 인상이다. 법의는 통견 방식으로 입었으며 상체 정면으로 길게 흘러내린 법의자락이 거의 무릎 부분에서 안에 입은 편삼과 겹쳐져 U자형을 이루었다. 간결하고 수직으로 처리된 법의 주름은 가슴 중앙에 수평으로 가로지른 내의 띠주름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강렬한 느낌을 준다. 또한 무릎 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은 사선으로 처리하여 불상 전체에 수직과 수평, 사선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데 여기에 배 부분을 부풀려 양감있게 처리하거나 팔꿈치에 겹치는 옷자락으로 변화를 주었다.
손은 별도로 만들어 내부를 둥글게 판 손목에 끼웠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을 앞으로 향하게 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살짝 내린 상태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한 채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下品中生)의 아미타설법인을 결하였다. 손바닥에는 ‘キ’형의 손금을 간략하게 음각하였다.
백양사 극락보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거대한 크기, 허리가 긴 상체 비례와 볼륨감이 특징으로 이는 16세기부터 17세기 전반기에 유행한 시기적 요소들이다. 전체적으로 직선의 옷주름을 강조하여 딱딱하면서도 장중한 조형감, 안정된 분위기를 보이는데 자비롭지만 근엄한 얼굴 표정과 더불어 임진왜란 이후의 시기성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을 위로하고 강대하고 안정감있는 국가의 미래를 원하는 이상성을 투영한 것처럼 느껴진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좌, 183.7×51.5cm. 조선 1607년
무엇보다도 이 불상의 중요성과 가치는 이후에 등장하는 불상의 유행과 제작기법을 암시하고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불상은 나무로 전체 형태를 만든 다음 살집이나 주름은 흙을 이용하여 양감을 주는 새로운 기술을 창안하여 제작하였다. 즉, 나무와 흙을 결합하여 2m 이상의 대형불상을 솜씨 좋게 만든 새로운 기술을 처음으로 창시한 것이다. 이는 천재 조각승 현진비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현진비구는 1607년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만든 이후 대형소조불상을 연이어 만든 우리나라 대형소조불의 창시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509cm의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1626년), 521cm의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1633년)을 만든 장인이다. 우리나라 3대 소조대불이라고 부르는 545cm의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도 현진비구에게 배운 제자 청헌에 의해 제작된다. 즉, 조각승 현진비구는 장성 백양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제작하면서 그 어려운 나무와 흙의 조합, 대형불상의 제작 기술을 창시하고 제자들에게 전수한 것이다. 조각승 현진비구가 있었기에 17세기의 그 수많은 불상 제작 기술이 진보하고 발전할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 제작기술과 전통은 맥을 잇지 못하고 현재 거의 사라져 없어졌다.
곧 7월~8월, 국내와 해외로 떠나는 두근거리는 여름휴가가 기다리고 있다. 아직 정하지 못한 많은 분들에게 권하고 싶다. 조선 왕실의 역사와 문화유산이 넘치는 백양사, 풍부한 먹거리에 숲과 호수, 꽃이 아름다운 장성으로 떠나볼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