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산 생태숲 산소길은 강원도 18개 시·군이 함께 만든 ‘걷는 길’이다. 강원도 여러 곳에 산소길이 있지만, 홍천 수타사를 낀 산소길이 인기 있는 길이 편하면서 제주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 못지않게 공작산 숲과 수타사계곡이 빚어내는 경치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제1코스부터 제4-1코스까지 총 다섯 코스 가운데 가장 긴 1코스는 약 10킬로미터, 가장 짧은 4-1코스는 약 800미터에 불과하다. 왕복 5킬로미터의 제2코스는 찾는 이들이 가장 많다. 수타사를 참배하고, 공작산 생태공원을 들러본 다음, 수타사계곡을 따라서 숲속 깊이 들어가 숲속치유쉼터, 신봉마을 입구 징검다리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이다. 돌아올 때는 출렁다리를 건너 수타사계곡 맞은편 길로 내려오면, 귕소와 용담 등 계곡의 경치를 좀더 가까이에서 감상할 수 있다. 너른 바위에 앉아서 간식도 먹고 쉬엄쉬엄 걸어도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면 넉넉하다.
공작산 입구 사하촌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트레킹을 시작한다. 주차비는 없다. 오른쪽은 소나무숲 사이로 산책길이고, 왼쪽에는 수타사 경내까지 찻길이 뚫려 있다. 소나무 숲길 오른쪽에 자리 잡은 부도밭을 들러보자. 홍우당부도(강원도 문화재자료)와 청송당부도 등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대표적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7기의 부도와 2기의 부도비가 자리 잡고 있다. 홍우당(1611~1689) 스님의 부도에는 네모난 사리 1과와 둥근 은색 사리 2과가 들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숲 소나무들은 일제강점기에 받은 아픈 상처를 아직도 몸에 두르고 있다. 일제가 전쟁에 필요한 송진을 채취하려고 껍질을 벗겨낸 자국이다. 힘없는 나라는 백성뿐 아니라 자연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아프게 다가온다.
주차장에서 부도밭을 거쳐 수타사 입구 봉황문까지는 10분쯤 걸린다. 수타교와 금방 울릴 듯한 은은한 미색 종 모양의 다래꽃이 핀 다래터널과 공작교를 지나면 사천왕이 지키는 봉황문이 나온다. 이 공작교를 경계로 위쪽이 수타사계곡이고 아래쪽이 덕치천이다.
보물 지정을 청원 중인 봉황문 사천왕상들은 나무로 심을 만들고 새끼줄로 감은 다음,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모양을 잡고 색을 칠한 소조(塑造) 작품이다. 1676년 조성된 것으로 강원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의 애민심이 낳은 보물 《월인석보》
대적광전 참배를 마치고 비로소 둘러본 경내는 온통 불두화 꽃대궐이다. 원통보전과 삼성각의 앞뜰에는 큰 꽃다발 같은 불두화 한 그루가 하얀 꽃잎과 눈부신 햇살 속에서 몽환적인 봄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에도 이미 하얗고 푹신한 꽃융단이 수채화를 그리는 중이다.
목조 관음보살좌상(강원도 유형문화재)이 주불인 원통보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친견했다. 크고 작은 7개의 사리함과 함께 발견된 4과의 사리 중 1과는 원통보전 관음상 복장에서 나왔고, 3과는 대적광전 닫집 위에 있었다고 한다.
수타사의 가장 귀한 보물, 《월인석보》는 성보박물관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월인석보》 권17과 권18은 훈민정음, 즉 한글로 처음 펴낸 불경 언해본이다. 수양 대군(세조)이 쓴 《석보상절》(1446)과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1447)을 합쳐서 1459년 세조의 명으로 주자소에서 간행했다. 한글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세종은 수양 대군에게 명해서 어머니 소헌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부처님 일대기인 《석보》를 한글로 번역, 편찬하게 했다. 그것이 《석보상절》이다. 일 년 뒤에 그 책을 읽은 세종이 감명받아서 몸소 2구절에 따라 한글로 찬가를 지어 《월인천강지곡》을 펴낸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가 백성들을 생각하는 세종대왕의 애민심에서 비롯된 만큼, 이를 널리 펴고자 펴낸 《월인석보》에도 그 마음이 담겼음은 물론이다. 특히 초간본인 권18은 국내에 단 한 권뿐이어서, 불교뿐 아니라 국어사 연구에도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책이다. 인왕문 사천왕상을 해체 수리할 때 지국천왕 복장에서 발견되었다.
보장각에는 보물인 《월인석보》를 비롯해서 수타사괘불과 수타사지장시왕도 등의 강원도 유형문화재, 화엄경 등의 서적과 전패, 조각품 등이 보관되어 있다. 1670년 조성된 또 하나의 수타사 보물인 동종은 범종각에 보관 중이나, 파손을 우려해서 타종은 하지 않는다. 17세기의 뛰어난 승려 장인 사인 스님이 신라종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발휘해서 조성했다.
계곡 따라 이어지는 수타사 산소길
본격적인 산소길은 봉황문 앞 공작산생태숲공원부터 시작된다. 수타사 사유지인 생태숲공원과 생태연못은 2009년 홍천군에서 조성했다. 산딸나무, 앵두, 마가목, 소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등의 지상 식물과 연꽃, 부레옥잠, 청포 등의 수생식물 수천 종류가 서식하고 있다.
이 생태숲 자리에는 본디 수타사의 논이 있었다. 논과 봉황문 주변의 땅이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여서 수십 트럭의 흙을 사다가 메우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었다.
아기자기한 생태숲공원을 지나 계곡 오른쪽으로 숲길이 시작된다. 계곡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길이 있는데, 올라갈 때는 오른쪽 길을 따라가는 게 좋다. 이 길은 수타사 아랫마을 사람들이 농사용으로 계곡물을 끌어오던 수로를 땅에 묻고 만든 길이다. 야자나무잎을 멍석처럼 짜서 푹신하게 깔아놓은 덕분에 무릎과 발목이 편하고, 왼쪽 수타사계곡의 우렁찬 물소리가 땀을 식혀준다. 무성한 나무들이 한겨울 추운 바람과 한여름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니, 사계절 경치를 맘껏 즐기며 걸을 수 있다.
도란도란 걷다가 깊은 숨 한 번 들이쉬면, 온 몸으로 맑은 기운이 퍼져가고, 청량한 산소가 폐를 가득 채운다. 쪼르르 길을 가로질러 가던 다람쥐도 사람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는다. 산소길이란 이름이 왜 지어졌는지 공감하는 순간이다.
40분쯤 걷다 보면 만나는 귕소는 넓은 바위와 맑고 깊은 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소 여물통을 닮아 ‘귕소’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귕’이 여물통을 가리키는 강원도 사투리라고 한다. 귕소 출렁다리가 수타사로 되돌아가는 반환점인데, 거기서 발길을 돌리기는 아쉬움이 남는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 신봉마을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때문이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가 기다릴 것 같은 운치 있는 징검다리까지, 꼭 가보기를 권한다.
오던 길을 뒤돌아서 소 출렁다리를 건너면 계곡 맞은편으로 좀더 아기자기한 길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수타사까지는 약 2킬로미터. 내려오는 길은 나무 덱 계단도 있고, 조금 오르락 내리락하는 산길이어서 더 재미가 있다.
수타사가 가까워질 무렵,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의 깊고 시퍼런 용담(龍潭)이 나타난다. 물속에 박쥐굴이 있어서 소용돌이가 일어 한 번 빠지면 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용담 부근 작은 능선에는 조선 세조의 왕비인 정희 왕후(1418~1483)의 ‘태실’이 있었다고 한다. 허나 1928년 조선총독부가 조선 왕조의 정기를 끊으려고 전국 사찰에 있는 왕실의 태실을 찾을 때 정희 왕후의 태실은 발견하지 못했다. 어린 성종을 대신해서 7년간 조정을 다스린 정희 왕후는 악법을 없애고 반대파를 감싸 안는 등, 과단성과 노련함으로써 조선을 안정시켰다. 용담 부근 숲길에 세조가 벼슬을 내린 속리산 정이품송의 자목(子木)이 자라고 있다. 세조와 정희 왕후의 인연이 어린 소나무를 이곳으로 이끈 셈이다.
수타사 건너편 월인쉼터에서 차 한 잔 마시며 숨을 돌리고 나서, 그 위쪽의 삼층석탑(강원도 문화재자료)을 찾아가 보자. 고려 후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삼층석탑은 단층 기단에 2층, 3층 몸돌과 상륜부가 사라지고 1층 몸돌만 남아 허름하지만, 그 자리가 창건 때의 일월사 터로 짐작되어 귀한 대접을 받는다. 다만 우적산 일월사 터가 수타사 상류쪽 8킬로미터 지점, 큰 삼층석탑이 허물어져 있던 곳이라는 의견도 있다.
주차장까지 내려갈 때는 올라온 건너편 길, 덕치천 산책길을 택하면 한여름 계곡의 또 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