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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사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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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염쟁이 유씨

  • 입력 2013.03.31
  • 수정 2024.11.29

 

 

▲ 연극 ‘염쟁이 유씨’ 포스터

 

유씨의 체온이 싸늘한 시체에 닿는다. 거친 수의를 입히고, 혹여나 근육이 굳을세라 이곳저곳을 주물러준다. 유씨는 ‘염쟁이’다. 죽은 사람의 몸을 닦고 옷을 입혀 관에 넣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천하디천한 직업이지만, 유씨가 삼대째 해오던 일이었다. 물론 그 일을 유씨의 아들 또한 이을 수 있었지만, 차마 유씨는 그 일에 대해 말을 쉬이 꺼내지 않는다.


염쟁이 유씨는 자신의 핸드폰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며, 관객에게 자신의 번호로 전화를 걸라고 말한다. 관객들은 어리둥절해하며 배우의 눈치만 살필 뿐이다. ‘왜 대답이 없어’ 염쟁이 유씨의 말에 무대를 비추던 조명은 관객에게로 향한다. ‘탁’하고 불이 켜지는 순간, 무대보다도 관객석이 빛이 난다. 관객석은 그렇게 무대가 된다. 본격적으로 연극이 시작되기 전, ‘핸드폰들 끄셨나?’하며 워밍업을 한 것이다. 극장 예절을 알려줌과 동시에 관객이 연극에 흡수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어 염쟁이 유씨는 정성스레 시체 한 구를 어루만진다. 아주 능청스럽게 관객에게 ‘염쟁이 체험을 하러 온 전통문화단’이라고 칭한다. 그리고 관객 1명을 찍어 ‘기자’라는 역을 붙여준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맞장구를 치는 관객의 참여로 연극은 즐겁게 시작된다.


나는 임형택 배우의 공연을 봤다. 무려 1인 15역의 연기! 1인극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정말 무대를 꽉 채우는 연극이었다. 분명 일인극은 지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도 한 사람이 그 긴 시간 동안 무대와 객석 모두에게 널리 흡수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여섯 명이 나오던 연극보다도 더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연극을 볼 때, 적게는 3~6명 정도가 나온다. 그러나 각자 맡은 캐릭터에 한계가 있고, ‘더 새로운 인물이 나오지 않을까’하다가 지루해져 버린다. 물론 매력 있는 캐릭터에게는 그럴 일이 없지만, 대부분은 연극 도중 배우에게 익숙해지기 일쑤다. 심하게는 지루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일인극은 매 순간 신선했다. 전혀 작위적이지 않았다. 또한 배우가 존경스러웠다. 연륜이 있기에 연기력이 보증되나 체력이 부족하여 나이가 든 배우를 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임형택이라는 배우는 전혀 달랐다. 중간중간 객석에 실제 소주를 따르거나 티켓을 나눠주는 등 쉬어가는 시간이 있었다. 호흡의 조절이 아주 좋았다. 웃긴 장면과 감동적인 장면을 작위적으로 나누면 억지로 짜인 감동에 관객이 호응해줘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혀 그런 것 없이 흘러갔다. 플롯이 아주 잘 짜인 연극이었다.


“젊은 사람이 먹지도 못했는지 몸이 삐쩍 말랐어.”

유씨는 시체를 정성껏 닦으며 말한다. 마지막 염이라면서 그는 몹시 정성스레 닦는다. 왜 저렇게 정성스레 닦을까, 원래 일에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하는 것일까. 나는 의문이 들었다. 맞다, 유씨는 원래 성격이 정직한 사람이다. 자신의 일을 제외하곤 돈이나 허영에 관심이 없다. 일을 아주 사랑하고 있기에 묵묵히 아버지가 억지로 물려주신 염쟁이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당장 생명이 위급한 것도 아닌데 왜 마지막 염을 하는 것일까.

결국 그 시체는, 염쟁이의 아들이었다. 꼭 염쟁이 일을 하고 싶다던 그의 아들을 도시로 보낸 지 몇 년이 흘렀을까, 아들은 영 소식이 없었다. 그리고 만나게 된 것이 아들의 자살소동이었다. 그는 아들을 도심에 보낸 것을 후회하는 것일까. 그는 허심탄회한 표정으로 눈물을 흘렸다. 자신은 염을 하고 싶지 않아 했으나 아버지가 3년간 염쟁이로 살라고 했던 대로, 자신 또한 자식에게 염을 하지 않고 3년간 도심에서 살라고 했던 것을 후회하는 것일까.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은 이렇게 염을 하고 있으며, 자식 또한 자신의 뜻대로 도심에서 연락도 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결국 그의 행복을 방해했던 것을 자초한 셈이었다.

 

포스터의 표지를 보면 ‘죽는다는 건, 목숨이 끊어진다는 것이지 인연이 끊어지는 게 아니야’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연극 마지막에 ‘잘 사시게나’라는 당부 못지않게 명대사이다. 더욱 우리나라에선 그런 것 같다. 제사를 지내고, 삼 년 동안 돌아가신 부모를 모시는 제도 등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이 더욱이 길다. 고인 또한 여전히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목숨이 끊어질 뿐, 인연은 남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정과 깊이 얽힌 우리네 ‘인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조계사 글과 사진 : 조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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